다산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있다. 이 집 뒤편 동산은 다산이 뛰어놀고 호연지기를 품었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뒷동산에 다산 묘가 있고 앞으로 조금 나아가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듯 한강이 흐른다. 작가는 “이 고졸(古拙)한 가옥의 마루에 앉아 마음과 정신의 중심을 살찌운 다산을 생각을 해 본다”라고 말했다.
화가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돌에 새겨진 한편의 시(詩) 앞에서 한참을 서 있곤 한다. 실로 행복한 가정의 화평(和平)한 그림 같은 문장이지만 딸을 그리는 애틋한 아버지의 마음이 밀려와 눈시울이 절로 붉어지곤 한다”라고 피력했다.
“어린 딸애 단옷날이면/치마는 붉은 치마 머리 뒤엔 푸른 창포잎 꽂았었지/절하는 연습한다 예쁜 모습 드러냈다오/오늘 같은 단옷날 밤에는 누가 있어 우리 딸아이를 구슬리까”<어린 딸이 보고지고, 여유당집 권11, 1801년>
두 물이 합쳐져 큰물이 되는 두물머리이듯 민생과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다산 학문의 근본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작품 ‘여인의 마음을 놓다’를 그리는 나는 이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단순히 그림이 주는 감동 그 이상의 본질에 대한 심미세계관(審美世界觀)에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5년 8월1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