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꽃들이 속삭였다 ‘사랑하세요’- from, 서양화가 김태영(김태영 작가,화가 김태영,김태영)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5. 12. 15:14

 

 162×130cm mixed media, 2011

 

 

   

사랑이야기연작-인생이란 호수를 비추는 아름다운 순례

 

 

졸음 겨운 새벽 가로등 불빛 아래 안개는 소리 없이 마을로 내려왔다. 아침 실바람 살랑거리는 베이비 블루(baby blue) 커튼 뒤 소근소근 정겨운 작별인사를 나눈 자상한 안개는 양귀비꽃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한 동산 숲으로 사라졌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 입술을 적시다 음반을 얹는다. 앙드레 가뇽(Andre Gagnon)첫날처럼(Comme Au Premier Jour)’ 선율이 발코니 넘어 정원으로 잔잔히 흐른다. “아직도 내 몸 맴도는 그대 체취. 당신 안에서 길을 잃으면 아니 될까요.” 불현듯 속삭인다. 소망이 어느 날 이뤄지는 것을 희망의 끈이라 하지 않는가.

 

, . 처마 끝 낙숫물처럼 나뭇잎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꽃잎 위로 떨어진다. 하얀 손등 위 차가운 전율로 부서진 방울 하나. 사랑은 황홀했던 기억의 자양분인가, 떠오르면 속눈썹 젖어오는 망망(茫茫)바다 한 마리 새처럼 다시 홀로였다.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은 아즐타.”(김광섭 시, 고독) 비는 가루분()처럼 고운 결로 붉은 양귀비 꽃망울을 흠뻑 적셨다. 아침이 열리는 줄도 모른 채 송이마다 인사를 나눈 안개는 어느새 무지개처럼 창공에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90.9×72.7cm mixed media, 2011

 

 

호숫가 벤치. 내 가슴 그리움만한 꽃송이들이 잔물결 따라 점점 부풀어 오를 때, 웃는지 울고 있는지 까칠한 향기를 차갑게 흩뿌리며 시샘 바람이 스쳐갔다. 그때 어디선가 올라온 물고기떼들은 붉은, 하얀, 노란 꽃송이 사이를 오가며 마냥 즐거이 꽃밭에서 놀고 있었다. 바람은 물결에 출렁이며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

 

꽃잎들이 흔들릴 때마다 물고기들은 직각으로 지느러미 방향을 틀었다 제자리로 돌아오며 가끔 진실을 가늠하기도 했다. “바람이 가라앉았다. 여기저기 붉은 망울은 터지고 고기떼들은 꽃 속에 순례자(巡禮者)를 위한 침실을 분주히 준비했다라고 작가는 메모했다.

 

그렇게 보고파 하면서도 바로 앞에서 말을 잊어버린 고백록의 첫 문장. “가을 산 억새같이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본 당신이 오래도록 내 존재 의미의 마지막 유산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얼만큼 목마름이기에 달은 저토록 푸름으로 흐릅니까. 가녀린 꽃잎은 애처로이 떨어져 어인 연유로 저 투명한 깊은 호수 아래에 쉬이 갈 수 있었습니까.”

 

 

 

53.0×45.5cm mixed media, 2011

 

 

붕어 한 마리가 늪에서 찾아 건져 올린 짝 옆에서 하염없이 뜬눈으로 아침을 기다렸다. 상처 난 비늘. 빛은 신화처럼 치유의 힘을 증명했다. 더 이상 눈부실 수 없는 찬란한 정오. 수놈이 생애 처음으로 몸통을 휘며 수면 위를 힘차게 튀어 올라 두리번거리다 외쳤다.

 

사람이 산다면서 그 시골집에는 왜 잔치도 한번 없냐,”(김춘수 시, 영혼)

이 야릇한 소리는 곧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며 빠른 유속처럼 퍼져나갔다. 그날 이후 며칠 뒤 소낙비가 호수 위에 쏟아진 저녁 무렵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잰 걸음으로 호숫가에 기다란 띠 모양으로 모여들었다. 사랑은, 죽는 날까지 서로의 눈길을 가슴에 품는 것 그뿐인데도.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