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자연과 교감 ‘경계’ 헐어 근원 표출-from 화가 김선일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5. 11. 23:41

 

 추산행려(秋山行旅) 80×100수묵담채 2010

 

 

 

산천의 정겨움 담은 서정적 진풍경 화폭에

 

 

인적 없는 황토색 토산(土山)자락에 오후의 가을빛이 환하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순연(順延). 이윽고 그 마음의 몸살을 털어낸 귀환의 꼬불꼬불 산 길 너머엔 또 다시 길.

 

뭉실뭉실 뭉게구름 흐르는 가을빛 드는 저 고개 휘어진 허리 즈음 비스듬히 무리지어 핀 노란 국화 꽃송이들. 아아, 그랬었지 일곱 살 어린 시절. 누이는 헤진 치마에 자꾸만 감국(甘菊) 꽃잎을 노을이 질 때까지 분주히 한 아름 모았다.

 

그 후 고드름이 초가지붕 처마에 엿가락처럼 매달리는 겨울 찬바람, 꽃과 향이 빛나는 차 향기 그윽한 국화차가 아버지 숙취를 풀어준다는 것을 그땐 몰랐었네.

 

마치 추억을 이야기하는 듯한 화폭. 한 번 번지면 수정이 불가능한 한지처럼, 수많은 시간의 축적이 만든 가을날의 회상. 한 획 한 획 정성을 쏟은 흔적은 우리들 내면에 숨어 있는 작은 봉우리를 지나 어릴 적 집으로 향하던 향수를 느끼게 한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문으로 황토 먼지 회오리가 휘익 지나간다. 어느새 입 안으로까지 텁텁한 황토가루가 앉았다. 다시 찾아온 산과 산이, 빛과 그늘이 어우러진 고요한 파장, 속삭임이 경이롭다.

 

바람이 전하고 가끔은 풀 벌래 소리가, 산이 산끼리 마주하며 서로를 흔들어 깨우는 외진 산골의 울림. 엉엉 울음을 삼키며 떠나온 저 솔치재 고갯길. 동네 뒷산의 밤이며, 모과며, 감이 익어가고 하얀 눈이 오면 대롱대롱 걸렸던 감 파먹던 까치의 경쾌한 식탐을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쳐다보았었다.

 

 

 

가을갈대 90×72수간채색 2009

 

 

고갯길. 거기서부터 내 기억의 등고선은 화면으로 옮겨진다. 그곳을 넘어서면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 그리고 어머니 품 속 같은 안온하기만 했던 바다, 바다여. 무언가 되고 싶었던 내 유년의 약속친구였던 여전히 솟아 있는 뒷동산 바위산이여. 그러나 여전히 나는 파도 따라 흔들릴 뿐 그 무엇이 되었나라고 김선일은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자연과 교감하고 묵시적인 대화를 통해 빚어내 경계를 허물어 근원으로 다가서려는 작가의 사의(思議)적인 심상은 보름달빛을 받아 더욱 푸르른 변함없는 소나무와 같이 자꾸만 시선을 끌어당긴다. 이러하듯 화면의 이원구성과 함께 표현주의 양식과 추상적 이미지가 어우러진 화면은 그의 작품세계를 노정(路程)하고 있다.

 

그는 한국성을 지향하는 인간 중심의 예술을 완성하려고 하는 인본주의를 성취하려고 하는 한국의 화가다. 자연의 현상세계를 작가 나름의 내재율에 의한 재해석 등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가고 있는 독특한 화가다.”(김남수 미술평론가)

 

 

 

일출 53×45혼합재료 2009.

 

 

 

묵시적 대화로 또 다른 자연 만들어

 

수묵화의 진리는 자연 속에 있다. 밀물 같은 산봉우리, 썰물은 산맥, 산이 곧 바다요 바다가 곧 산일 뿐인가. 이른바 일필일묵(一筆一墨)의 풍류. 묵이라 함은 검은 하나의 색이 아니요, 묵 속에 파란색이 보이고 다음에는 갈색을 발견하고 그다음에는 우주의 모든 색을 묵 속에서 발견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묵색이다.

 

김선일 작가는 나의 귀환은 시작을 의미한다. 돌아와 생기를 얻고 원초적인 정신을 만나는 것이 고향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산천의 기운은 정화로움에서 피어나고 감수성이야말로 심미의식의 근거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점에서 나의 그림은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작품 추산행려(秋山行旅)’는 바로 이런 길 일 것이다. “나 그곳에 오래 앉아/푸른 하늘 아래 가을 들이 또랑또랑 익는 냄새며/ 잔돌에 호미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었다/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이시영 시집 무늬 중 마음의 고향2-그 언덕중에서)

 

채우면 무거워지고 비우면 가벼워지는가. 여백의 아름다움. 수수께끼 같은 인생 행로의 편린 속 귀환 길. 그렇다면 는 비어 있는가 혹 모르거나 아니면 아내에게 저 언덕을 넘으면 행복이.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