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양규준(Artist, Gyu-Joon Yang)
플라타너스 커다란 잎들이 허공에서 회전하다 가로수 거리에 내려앉았다. 마치 한적한 어느 읍내의 곧게 뻗은 길 느낌 같았다. 그러한 곳, 서울시 송파구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 했다. 역동성이 강하게 전해오는 미완의 원(圓)이 그려진 작품들이 나란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지난 15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한국과 다른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는 “귀국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작업실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는 만남의 모두(冒頭)에 “어느 날 뉴질랜드에서 문득 내 자신이 혼성(混成)의 정체성을 가졌음을 느끼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 말에는 개체로서의 왜소한 자아, 현실과 향수에 대한 암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의 깊이와 찰나 등 “이중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 의식의 융화(融和)”가 캔버스에 녹아 스며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보였다.
Fluid mind, 130×260㎝, acrylic on canvas, 2010 (Diptych)
◇생성과 소멸 그 평형가치
혼성(Hybrid)의 드러냄. 그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소란과 정적, 이성과 감성, 생성과 소멸, 음과 양, 동양과 서양 등 상호적 요소의 대립을 지양(止揚)하고 평형의 가치를 통한 합일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그 조건은 홀로가 아닌 혼성이라는 여건이어야 가능하다. 또 하나는 변화하되 합일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서로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평화적이라는 평형가치가 녹아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명제 ‘Fluid mind’는 ‘나’의 존재에서 비롯된 내일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삶의 자취와 우주생성과 소멸이라는 혼성을 화두(話頭)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융·복합시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질문을 내어놓고 있는 것과 또한 다르지 않다.
Moderation, 76cm, 2012 (Diameter)
◇中庸, 두 폭의 조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태평양 아침 해안의 곧게 뻗은 야자나무 사이 하늘, 허공을 한가로이 떠도는 황혼 무렵 구름들은 빈 공간이 아니라 부단히 음과 양의 기(氣)를 부딪치며 기운을 전개 한다.”
이어 “내 작업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삼라만상을 있게 하는 어떤 징후를 헤아리는 일로부터 시작 된다”고 했다. 징후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연의 생명력과 삶을 내포하는 어떤 핵심을 읽어가고 또 풀이하려 할 것이다. ‘중용(Moderation)-안녕하세요?’라고 명명한 작품은 이러한 고뇌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Winter, spring, summer, autumn, 102×72㎝, 2010 (Each)
작가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대략 한 시간쯤 앉아 명상에 잠긴다”라고 전했다. 중용과 정신을 동일선상에 둔 그의 인식은 마치 번짐과 여백조화를 떠올리게 한다.
부연하자면, 명상 후 산뜻한 정신은 공간을 확 트이게 열어놓는다. 작가가 바라보았던 해안의 야자나무와 조국의 산하와의 재회에서 다시 확인한 하이브리드. 시간을 뛰어넘은 두 폭의 조화로움은 그렇게 중용의 정신으로 우러나고 있는 것이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3년 11월20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