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그릇-Bowl, 34×53㎝ 수제종이에 혼합재료, 2011
하얀 그릇 하나. 왠지 수줍은 듯 여유 남겨놓은 완만한 가장자리 선(線). 세월의 깊이만큼 손길 안아 따사롭다. 다양한 그릇 여러 항아리만큼이나 생각과 근심으로 가득 찬 내면. 그러나 그릇은 스스로 가득 차면 밀어낸다. 비워진 만큼의 깨끗한 마음, 비워져야 비로소 보이는 사물. 심상과 자연이 조화로운 정성스런 손길 깃든 화면의 한지 호흡이, 고르다.
손닿으면 곧 묻어날 듯 드높은 스카이 블루(sky blue) 하늘에 하얗게 피어오른 뭉게구름 행렬이 경쾌하다. 색 바랜 토기 한 조각이 산모퉁이 보드랍게 쓸려온 흙더미를 굳건히 받쳐주었다. 애씀을 알았었을까. 홍자색 송이풀 꽃이 망울을 맺었다.
꽃과 항아리. 가녀린 줄기서 홀로이 피어난 저들은 기나 긴 겨울밤 들꽃 차(茶) 한잔으로 천년의 인연, 담소(談笑)의 기쁨 함께할 것이다. 얼룩얼룩한 물고기 문양이 새겨진 색 바랜 토기에 대롱대롱 달린 물방울들은 서로의 리듬에 맞춰 물고기 방(房)을 은혜로 가득 찬 생명력 넘치는 우주의 세계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인간도 자연도 마음에 두면, 마음을 열면 그리 되나보다.
내 마음의 그릇-Bowl, 33×45㎝ 수제종이에 혼합재료, 2011
초록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허공은 나뭇잎 군무(群舞)에 바람을 싣는 계절. 길을 잃고 부유하던 엽서 한 장이 순백의 그릇에 내려앉았다. “소슬바람에 가팔라진 가슴/베어 물 듯 귀뚜라미 울고/홀로, 슬며시, 어둡게/온 생이 어질어질 기울어지는/벼랑 같은 밤.”<황인숙 詩, 가을밤> 창문 너머 쓸쓸히 돌아가는 그림자 하나. ‘사랑이, 지금 이 사랑으로 생명 다할 때 까지’ 비원(悲怨)했던 가을밤.
어느 겨울날의 월광(月光). 조금은 초췌한 미색 그릇으로 오랜 빗살무늬의 기억들이 사각사각 첫눈을 밟으며 왔다. 사람 자취 없는 저 언덕 너머 연보라 눈발이 고요히 다가오던 새벽녘. 힘겹게 서 있는 나목(裸木)에 보라의 눈송이들이 하나 둘 잎으로 피어났다. “고요한 달빛은 슬프고 아름다우며 나무속에 있는 새들에게 꿈꾸게 하네.”<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의 가곡, Clair de Lune(달빛)>
내 마음의 그릇-Jar&cloud, 32×41㎝ 수제종이에 혼합재료, 2011
송이송이 눈송이는 바람처럼 들꽃처럼 꿈처럼 다시 훨훨 길을 간다. 유년의 기억에 따스한 햇빛 한 그릇을 가득 담아주고 ‘내’ 마음의 그릇엔 보라색 눈을 뽀드득 뽀드득 채워주었다. 그리곤 잡으려하면 파드득 몸부림치며 빠져나가는 물고기처럼 황량한 들판으로 사라져갔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1년 8월1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