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MOON HOE SIL〕失鄕, 秋夜長-80년대, 중랑천, 그리움 (화가 문회실,문회실,수채화가 문회실, 문회실 작가, 서양화가 문회실, 문회실 화백)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4. 12. 14:03

농촌서정, 33.4×53.4Watercolor on paper, 2010

 

 

   

종이와 물의 만남. 흘리기와 번지기 그리고 어울림이 빚어낸 자연의 빛과 공기를 풍요롭게 머금은 화면. 곳곳에 묻어나는 기록과 사색의 여운(餘韻)은 고품격 수채화를 체감하게 한다.

 

 

바람은 막 살얼음이 얼 정도로 차고도 빠르게 불었다. 황혼이 슬그머니 넘어간 긴 방죽을 따라 다닥다닥 늘어선 판잣집엔 하나 둘 백열전등이 켜졌다. 졸졸졸. 몇 차례 여름 장마가 쓸고 지나간 하천은 군데군데 수묵(水墨)을 뿌려놓은 듯 저녁 안개는 가벼운 율동으로 아늑하면서도 냉기 머금은 실루엣을 연출했다.

 

그러면 그 흐름 사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녀린 귀뚜라미 울음이 낮게 울리고 군데군데 밤하늘로 기다랗게 뻗어가는 담배연기 따라 추야장(秋夜長) 고독의 영혼들이 맴돌았다.

 

어느 새 동이 트고 있었다. 바람막이 두꺼운 덮개 위 아침햇살 비치면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늘 그 시각 즈음 깨었다. 두부장수는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잘도 누비며 짤랑이는 종소리를 울렸고 하늘엔 지친 달이 저만치 아득히 걸려 있곤 했다. 그런 때면 서둘러 삐걱거리는 나무다리 옆 아침이슬에 젖은 키 작은 억새풀로 서둘러 갔다.

 

 

 

   

    그리움-80년대 중랑천, 53×72.7Watercolor on paper, 2011

 

 

 

그러면 건너편, 밤 지샌 봉제공장 불빛 사이 언니가 나타나 전날 들고 나간 노란 양푼 도시락을 딸그락거리며 지친 손으로 건네고는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몇 걸음 같이 걷다 집 가까이에서 나는 도망치듯 재빨리 뛰어가 언니의 이부자리를 펴주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골목을 붐비던 사람들이 몰라보게 줄었다. 아침이면 먼 산 풍경을 볼 수 없고 대신 고층 아파트가 하나 둘 들어서 얼마 동안 친구의 얼굴들이 겹쳐 우울하게 지낸 적도 있었다. 이웃집 아저씨도 작별인사를 왔다. 내 기억엔 일 년에 서너 번 술에 취해 홀로 둑에서 밤을 지새우던 분이셨다.

 

새벽이면 아버지는 담요를 말아 어깨에 덮어주고 돌아오셨는데 추석이나 설날 명절이 가까워오면 그랬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한번은 재 넘어 아장아장 걸어오던 코흘리개 여동생 손등이 너랑 똑같이 닮았다며 예뻐해 주셨는데 그땐 아저씨의 실향(失鄕)의 아픔을 모르던 나이였다.

 

 

 

   

    여수항의 노을, 31.8×41Watercolor on paper, 2010

 

 

 

외톨이가 된 나는 어머니에게 투정 부리기 일쑤였다. 저녁이면 간간히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들렸지만 이내 집 허무는 굉음에 묻히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이삿짐을 쌌다. 떠나기 전날, 언니를 기다리던 다리 옆에 앉아 간간히 흩날리는 밤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는데 큰 오빠는 우리의 집을 짓는데 천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뜻을 잘 몰랐었다. 큰 오빠의 말에는 물론 과장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거짓은 아니었다.”<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출처=-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1106일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