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륜 선생은 나에게 ‘전통불교의 도상을 예술작품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라’고 가르쳤다.1)”
근자, 국어학에 대한 울연(鬱然)하였던 학식축적(學殖蓄積)을 정기(精忌)한 범용한 학인들의 오해로 한문이란 이름의 국학고전이 무자비스레 도륙(屠戮)되어지고 인멸(湮滅)되어지려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한심스러움은 독서 없는 사람들에 의한 한자계(漢字係) 언문(言文)의 혼란기술(混乱記述)이다.
한자비근(漢字批斤)의 미망(迷妄)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허물이지만 대학(大學)에 있어서 한자 추방을 틈타서 한자장인의 오류(誤謬)는 실로 어찌해볼 도리 없는 노릇이다.
고전, 고대학(古代學)속에 비로소 있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말 굳이 붙이는 까닭은 비록 그림 한 장 제대로 독화(讀畫)하며 그리다 말고 사라져가는 생애일지라도 뭔가를 깨닫기 위해 온몸을 다바치기와 똑 같은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어린이들에 예능교육의 필요성도 바로 이 같은 것이다.
일점일획(一點一劃)의 ‘엔’ 곧 있음으로 해서 풍부한 감각, 풍부한 상상력보다 오히려 엄격한 규율 한가운데서 자유의식을 찾고자 함인 것이다. 철학이라고 하는 이름의 과학기술 예술이라고 붙여진 이름의 기능자(技能者) 그들은 이미 울연(鬱然)한 위세(威勢)를 갖춘 깊고 높은 산(山)의 전용(全容)을 알지 못한다.
까닭에 역사이건 고전, 고대학(古代學)이건 그것에 관심 두는 까닭은 지러지러한 사실 곧 ‘엔’을 많이 외우려는 것 분석, 판석(判釋)에 머무려는 것이 아니라 개적자아(個的自我)의 내적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한 엄숙한 규범을 공부하기위해서인 것이다.
진리파지(眞理把持)의 ‘샤타그라하’ 자타불해(自他不害)의 ‘아힘사’의 정신을 배운다 함도 그 탓이다. 이른바 ‘불교미술’이란 이름의 조상(造像)에의 근접도 적어도 이러한데 근거를 두고 공주하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현대인에 있어서 고전이란 그래야만 옳다.
옛날의 당대(當代)의 명가(名家)들, 솔거(率居, 新羅) 가서일(加西溢, 高句麗) 곤사나아(困斯羅我, 百濟), 하성(河成, 百濟의 余氏) 양지(良志, 新羅僧) 정화(靖和, 新羅僧), 홍계(弘繼, 新羅僧), 김충의(金忠義, 新羅將軍), 대간지(大簡紙, 고구려의 유민의 건국인 발해인) 등은 이미 울연(鬱然)한 위용을 역사상의 사상(事象), 사적(事蹟)으로 과시(誇示)되어 지고 있는 터이지만 그들은 오늘의 현대인과 같은 부정확-불확실한 난제(難題), 난문(難問) 들은 안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수용기(收容期)의 이른바 수성(守成)의 신미술(新美術)을 이른바 ‘소크라테스’나 ‘제논’=(에레아派)과 같이 “만유(萬有)는 다(多)”가 아닌 만물은 일체(一體)라고 보는 일원론적 부정론(否定論) 곧 ‘반(反)’의 입장에 섰건 ‘반(反)의 반대편에 섰건 그들이야말로 시대적제약(時代的制約) 곧 시대감각이 극히 난문(難問)스러우면서 예리(鋭利)하면 할수록 군맹목무(群盲目撫象)격이던적은 일찍 없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보다 옛날 사람들일수록 이른바 ’영원한 과제‘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가졌었는데 오늘은 그것도 없이 부정확한 난문(難問)들을 흔히들 후세에다 떠넘기려는 공기가 팽배(澎湃)해 있기 때문이다.
무인(武人)으로서 이순신(李舜臣), 철학자로서 원효(元曉)같은 사람을 두고 보더라도 그들은 다 함께 시대제약 한가운데 살았으면서 추호도 후세의 대사가(大史家) 같은 존재를 의식하거나 기대한 바 없이 문자 그대로 ‘삶의 중심을 꿰뚫고’ 온갖 난문, 난제를 당해내지 않았던가. 전거(前擧)한 사상의 조상(造像)의 명장(名匠)들도 어쩐지 그와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은 뜻으로 예술하는 현대인들은 홑으로 하나의 사실을 ‘진실’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서 소위 시대제약을 헤치면서 범용(凡庸)한 작가들과 뒤섞이지 않아도 되는 제공부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지혜롭게 ‘생의 중심지대’를 확보할 수 있음을 나는 생각한다.
고대-중세기의 소위 ‘불교미술’이란 일종의 ‘첨단기술’에 속하는 미술이었다. 한나라의 임금 곧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어용수요(御容需要)는 그의 숭신(崇信)의 도(度)와 전파(轉播)에의 열(熱)따라 보다 고도의 기능직이 되어 갔었다. 거기에는 ‘순수미술’이니 ‘산업미술’이니 하는 따위의 분석비판이 있을 수 없었다. 자못 첨단적 생산적 가치였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이 불교미술을 두고서 ‘생산적 미술’로 보는 사람은 없다. 맨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고전적 가치라면 그것을 재생산 가치로 활용, 이용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것을 ‘고전(古典)’으로는 치지 않은 것 같다. 직업전문 문화재 전문가로 불리우는 자들이 유물(遺物)-유품(遺品)으로 당할 뿐 건축, 조상(造像), 조탑(造塔), 회화의 각 방면에 걸쳐 재명 (再明), 재현(再現)해 보려는 작가는 거의 소지청야(掃地晴野) 꼴이다.
‘불교미술’은 이미 이 땅에 있어서는 고전도 뭣도 아니라는 말인가. 난문난제다. 본시 고전 속에는 황금도 석유도 없었다. 하물며 불교미술 속에 출세와 명예가 있을 리 없다. 모두가 새롭게 재인정(再認定) 되어 지고 재발굴하는 곳에 어떤 가치인들 되살려진다.
서급(西汲, 조향숙)의 작업은 이 방면 이 시대에 있어서 초생(初生)의 것이요. 치졸(稚拙)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고 있지만은 바라건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석유보다도 황금보다는 보다 귀중한 ‘규범(規範)’을 터득해내는 제목(題目)이 되어졌으면 한다. 심화(心華)를 개발하면 무상장엄(無上莊嚴)이라 한 것은 불타(佛陀)의 길이지만, 최고의 세계 드높은 세계를 향해 끊임없는 도전을 놓지 말아야 서급(西汲, 조향숙)의 대학2학년 때 걷고자 했던 비구니(比丘尼)길의 한 길이 보여지리라.
[참고문헌]
1)대담=권동철, 조향숙 작가 작업실, 2024. 5.
2)△글=석도륜(昔度輪). 병인년(丙寅年) 4월 초팔일(初八日)일 즈음하여 서급(西汲)부처의 조상길일(造像吉日)에 써줌. △출처=조향숙 제1회 개인전, 5월15~20일 1986, 동방플라자미술관 전시도록에 수록. 자료제공=조향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