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기다리나니 매화는 학이런가. 오동을 의지하나니 사람도 봉황이네. 온 밤 내내 추위는 그치지 않아 집 둘레의 쌓인 눈 산봉우리 되었네. 待月梅何鶴. 依梧人亦鳳. 通宵寒不盡 遶屋雪爲峰.1)”
대숲서 발현한 대지의 혼이 국화 향을 애처로이 읊는다. 아득하고 느릿한 대금산조가 산울림을 유희하다 수묵안개를 만나는 청량한 설산(雪山)이다. 하얀 빛에 반사되는 선(線)의 운율이 능선을 감돌다 암벽과 골짜기에 쌓인 낙엽에 둥지를 튼다. 뭉쳐있던 눈꽃송이들이 수줍게 낙하하는 명암의 쌍폭포. 호랑이 한 마리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허연 입김으로 파란(波瀾)을 내뿜는 겨울밤….
◇홍몽, 절대공간의 변주
때 묻지 않은 상태의 내면 이른바 천지자연이 막 창조된 아직 어떤 명칭이 없는 원기(元氣)로서의 절대공간 카오스(chaos)가 홍몽(鴻濛)의 상태다. 윤종득 작가는 유현한 산의 골격, 백두대간 설악산공룡능선으로 미학정신을 변주한다. 작업은 도침(擣砧)한 장지 위 황토를 고온에 구워 부순 미세입자를 올리고 다시 먹과 안료를 겹겹 바른다. 완전히 재가 된 상태에의 그을음으로 만들어진 먹은 깊은 현(玄)으로 발색된다.
황토와 먹, 두 재료가 성질로서의 완벽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검정과 흰색만을 썼지만 가장 화려한 색감으로 드러나는 이치다. 이는 오천년 한반도역사의 비의를 품은 산하의 미를 발견해 내는 회소(繪素)이자 전각예술의 지평을 확장한 회화세계라는 기록의미를 갖게 된다. “공룡능선에서 느껴지는 거칠고 자연스러운 바위골격의 선들이다. 돌에 새겨진 칼의 각역(刻役) 그 전각기법인 선 맛을 응용해 붓으로 그려냈다. 나의 독자적 화법을 ‘전각준법(篆刻皴法)’이라 명명한다.2)”
◇혈과 맥, 전통미의 형상화
화면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것 같지만 어마어마한 고리로 연결되는 탄탄한 축약으로 풀어내고 있다. 석가여래상 큰 바위암벽은 민중을 굽어보듯 옷 주름이 흘러내리는 듯 유려한 선의 느낌을 전한다. 또 조선시대여인의 기하학적 정수라 할 만한 선과 공간을 이어붙인 조각보, 자수의 원초적 모습도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에 의지하고 보호아래 조화롭게 사는 피안(彼岸)의 윤회를 한국의 전통미에서 발굴해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달빛 내리는 바위에 공교로운 노을이 배회한다. 추연(惆然)하던 꽃송이가 만개한 웃음으로 밤하늘을 날아오를 때 압축한 혈과 맥의 골짝 저 개산(開山)의 암자에 순례처럼 무수한 별빛이 쏟아졌다. 그 찬란한 행렬 속에 비치는 만개한 꽃잎, 아 열락(悅樂)이런가!
[참고문헌]
1)만해 한용운 평전, 한시-淸寒(청한), 김삼웅 지음, 시대의 창, 2006.
2)윤종득 작가, 나의 전각준법, 2023.
[글=권동철, 10월7일 2023. 인사이트코리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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