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겨울햇살이 한옥 창(窓)으로 스며들었다. 깨끗하고 따스한 온기가 전시장 가득 피어나 번지고 골짜기서 마주친 촌로(村老)의 깊은 주름처럼 화면은 상처를 도려낸 자리에 새 살이 돋은 생명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 회귀의 자국에 세속의 여운이 굴곡진 선(線)으로 길을 잇는다. 한 줄기 바람이 메아리처럼 지나고 목마른 짐승들이 얼음장 같은 낙수(落水)에 갈증을 달래는 저녁.
산 혈맥(穴脈)이 신음을 토한다. 저 피안(彼岸)의 꽃봉오리가 천상에서 쏟아지고 만상(萬象)의 번뇌(煩惱)가 손살 같이 날아가는 텃새 깃털에 실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녕 일장춘몽인가.
보채는 아이에게 등짝을 내준 할아비의 자애(慈愛)처럼 설악공룡은 기꺼이 제 체온을 나누어 혹한에 우짖는 바람을 잠재운다. 산다는 것도 꿈꾸는 것도 한 길 인가. 천년나무등걸이 뿌리박은 억겁시간의 봉우리에 맨살로 버텨온 능선의 연륜(年輪)이 비로써 필선(筆線)으로 뼈대가 서고 장엄한 화폭으로 세상에 나섰다.
구운 황토가 마침내 재가 된 그을음으로 만들어진 먹과 조우할 때 자축하듯 서로를 격렬하게 끌어안는 가장 화려한 극치의 빛깔로 드러난다. 도침(擣砧)한 장지 위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전각준법(篆刻皴法)’의 인연법이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천진한 단일(單一)의 몸짓이 홍몽(鴻濛) 속 구름처럼 떠 있다. 삼라만상 변화무상한데 한글자모음, 한자의 조형성이 교묘히 산맥에 스며들어 천지인(天地人)을 응축한 위엄의 자태로 가누고 있구나!
◇선의 맛 직절의 필법
폭포수가 하강하며 물안개 속에 번지는 굉음(轟音), 혹한의 눈보라가 수직으로 박혀있는 암벽의 볼 살을 거침없이 때리며 순식간 지나치는 듯 직절(直截)의 필법이다. 용맹(勇猛)과 고졸미(古拙美)가 혼재하는 고격의 조화로움에 현대미가 피어난다. 바로 윤종득(YOON JONG DEUK)화백이 독자성으로 구축한 화법세계, 전각준법(篆刻峻法)이다.
작가가 “돌에 새겨진 칼의 선 맛을 응용해 붓으로 그려낸 그림”이라고 말하듯 동양화의 준법에 새롭게 전각기법을 적용해 만든 최초의 기법이다. 이는 전각예술 인식의 확장(擴張)뿐만 아니라 특히 서(書)의 필획요소가 스며있는 전각예술과 동시대 한국현대미술의 회화성이 융합된 미학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시사점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한편 전시장엔 관람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산하 윤종득(山下 尹鍾得) ‘전각준법(篆刻皴法)’초대전은 서울종로구 북촌로, 갤러리 일백헌(一百軒)에서 11월15일 오픈하여 21일까지 성황리 전시 중이다.
[글=권동철, 11월17일 2023, 인사이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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