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하는 직관은 무엇보다도 내적 지속과 관련된 것이다.…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직관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 그것도 직접적인 의식이다. 그것은 보여지는 대상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투시다. 그것은 접촉이자 일치인 인식인 것이다.1)”
화면은 평면에 한순간의 힘으로 찌그러져 구겨진 흔적과 그 그림자를 남기는 외현의 사실감으로 드러난다. 기억의 집적이 열어놓은 광대무변(廣大無邊) 공간으로 아직 덜 아문 상처를 위무하는 선율이 어디선가 꿈길처럼 들려왔다.
반복되는 물성의 겹으로 축적된 색칠 위 단상(斷想)의 빠른 필치가 남긴 한순간의 흔적에 일상이 기록되는 새벽녘. 마음의 몰입이 베푸는 안온한 기(氣)의 생동 그 붓 자국에 흠뻑 적셔져 마침내 소멸되는 망상(妄想)의 조각들이 허공을 향해 살풀이춤을 뿌리누나.
“거친 바위와 깨어진 돌덩어리는 어떤 세월의 풍상을 건너 현재에 왔는가. 나는 늘 자연에서 만들어지는 위대한 역사와 시간을 생각한다. 작품노동은 모든 걸 잊게 하고 온전히 그것에 빠져들게 한다. 이를테면 정처 없이 물위를 떠가는 그림자, 유유자적 마음의 여백 그리고 스치는 바람에 무덤덤하게 얹혀있는 저 찰나와 회우(會遇)하는 세월….2)”
◇호흡과 리듬 그 필연의 순환
꽃망울에 앉은 햇살의 겹 사이 반짝이던 물방울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산허리에 걸려있던 오렌지컬러 홍하(紅霞)가 오묘한 허공의 무대로 사라져가는 해거름. 구겨진 충동의 실루엣, 아려오는 생채기가 심연에서 발현(發顯)되는 수행의 자국처럼 컨템퍼러리(Contemporary)한 전환의 현대미로 펼쳐진다.
“數家山郭翠微開 炙眼蒸紅夾磵栽. 吹面番風如被酒 嫩晴天氣近恢台. 두서너 집 산곽에 아지랑이 갓 걷히니 눈부시게 타올라라 시내 낀 붉은 노을. 낯에 부는 번풍이 술 기운을 올리는 듯 곱게 개인 하늘 기운 회대에 가까우이.3)”
하여 봉우리를 감돌던 느릿한 밤안개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때 바람 한 점이 휙 지나고 추상(追想)의 언어가 불멸의 기록이 된 비문(碑文)이 서서히 드러났다. 물아일체를 지향하는 미의식의 뿌리가 천진무구한 필획(筆劃)으로 강물을, 바람을 휘저어 다시 아침을 준비하던 치열했던 열정들.
“유년시절 어느 하나 똑같지 않게 쌓아지는 시골담장과 한옥서까래 행랑을 올리던 목수의 솜씨가 너무나 신기했다. 어느 해 초가을, 유교적 전통이 오롯이 전해오던 고향 경북예천의 큰 대들보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가던 도포(道袍) 자락의 서화가(書畫家) 어르신모습에 눈이 번쩍 뜨였다. 면면히 이어오던 조선후기 한국적문인화의 정신성과 조우했던 그 기억이 시간이 흐를수록 내 예술의 씨앗으로 발아(發芽)한다는 것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는 요즈음이다.4)”
[참고문헌]
1)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uvant),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지음, 이광래 옮김, 문예출판사刊.
2)제이영(J Young)작가, Moment-여백과 또 하나의 바람, 2022.
3)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시, 북둔에서 꽃을 구경하고 성을 벗어나 구호하다(北屯賞花 出郭口號), 완당전집 제10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역(譯), 1986.
4)화가 제이 영(J Young, 본명:정재영), 자유로운 페인팅-먹(墨)과 담장에 대한 유희(遊戲), 2023.
[글=권동철, 1월호 2024, 인사이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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