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싹트기를 슬프지 않기를
“말해보렴, 아가트, 가끔씩 네 마음이 컴컴한 대양 같은 추잡한 도시로부터 멀리, 푸르고 맑고 깊은 처녀성 같고, 광채가 찬란한 다른 대양으로 날아가버리니? 네 마음이 가끔씩 날아가버리니, 아가트? 1)”
강가 물안개. 아른거리는 잔영(殘影)으로 부드럽게 아침햇살 스며든다. 그리움은 벌써 가 닿아 말을 건네는데. 치마를 입은 여인. 한 손은 주머니, 한 손만 내놓고 있는 무언(無言)의 미묘한 여운사이로 팔랑거리는 나비 떼….
◇우연의 끌림 꽃처럼 피어나길
그동안 동판화로 호평 받아 온 박선랑 작가는 최근 드라이포인트(dry point)판화기법으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화면은 은일한 교감메시지로 승화시키는 어떤 헤아릴 수 없는 연속의 끌림으로 읽혀진다. 간결하고도 풍부한 뉘앙스의 스토리텔링을 품고 마치 필연이 우연성을 동반한다는, 공시성(synchrony)이라고 해도 무방할 그런 관계성을 내포한다.
“누군가의 사랑이 싹트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휘어진 꽃 끝에 하트를 그려 넣기도 하고, 옷을 벗을 것인지 더 입을 것인지 중성적이고 이중적인 모호한 경향을 드러낸다. 어슴푸레한 흐름 속 발돋움하는 사랑의 감정이, 침묵 속에 흐르는 다감한 음성이 들리는 듯 명암대비와 절제된 페인팅으로 이뤄진 독특한 작풍(作風)이 그러하다.
판화와 회화하모니 특유의 손과 발, 인체의 부분을 부각시킨 함축적 미의식은 즉흥성의 인상이 더해져 간결하지만 풍성한 감성공간으로 전개된다. 그러한 우연성이 내포된 흥미로움이 박선랑 회화의 특징이자 현대성이기도 하다.
‘침묵의 욕망’연작명제가 암시하듯 인적 없는 겨울밤을 비추는 가로등 빛발처럼 내면 결을 조심스레 살짝 비추는 감정을 띤다. 어쩌면 슬프지만 마침내 행복의 결말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며있어 따뜻하다. 그 조용한 욕망 속에 내재된 순수성의 휴머니즘은 우리 생(生)의 작고도 고귀한 씨앗과 다름 아닐 것이다.
박선랑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살면서 침묵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때론 고요한 가운데 자아를 만나보는 시간이 절실할 때가 있듯 ‘참 나’를 만나는 여정에서 그 침묵을 승화시키고 싶었다.”
[참고문헌]
1)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지음, 앙리 마티스 엮고 그리다, 詩 슬프고 방황하는(Moesta et errabunda), 이효숙 옮김, ㈜미르북컴퍼니刊.
[글=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인사이트코리아 2월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