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소식

[MMCA 이건희 컬렉션특별전 한국미술명작-(5)]이인성,LEE Insung,장욱진,CHANG Uc-chin,박래현,PARK Rehyun[MMCA Lee Kun-hee Collection Masterpieces of Korean Art,021년 7월21~2022년 3월1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1전시실]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22. 2. 4. 19:50

이인성-다알리아, 72.5×99㎝ 캔버스에 유채, 1949. 사진=권동철.

 

 

이인성(LEE Insung,1912~1950)

이인성은 서양화가 도입되고 정착되던 시기에 괄목할 만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던 근대기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8년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후원자의 도움으로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의 오오사마 상회에 입사하여 야간에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9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매년 출품하여 특선, 창덕궁상을 비롯한 주요 상들을 수상하였고, 일본 제국미술전람회등 여러 전람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36년에는 대구에 이인성양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서양화를 알리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술에 취해 귀가하다가 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져 총기오발 사고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인성은 일제 강점기라는 어둡고 암울했던 시기에 풍요롭고 상징적인 색채와 뛰어난 감각으로 우리 미술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그토록 현격한 작품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정규교육 과정들 거치지 않고 당시 일본에 유입되었던 서구의 다양한 영향을 독학으로 흡수하며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인성은 길지 않은 화력이었지만 일생동안 수채화와 유채화를 병행했다. ‘다알리아는 그가 사망하기 몇 해 전에 제작된 작품으로 정원에 만발한 다알리아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에 나타난 경쾌하고 투명한 느낌을 살리기 보다는 대상을 단순화하여 식물군상을 구불거리며 너울지게 나타내고 있는 유채화이다. 이인성의 향토에 대한 관심은 도일이전 향토회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가 평생에 걸쳐 고향과 향토에 대한 의식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박수진>

 

 

 

장욱진-공기놀이, 65×80.5㎝ 캔버스에 유채, 1968.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장욱진(CHANG Uc-chin,1918~1990)

장욱진은 충청남도 연기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시서화에 대한 안목이 높았던 그의 부친은 자식들에게도 그림을 권유하였다. 그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특별활동으로 미술반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일본인 역사교사에게 항의한 이유로 퇴학당하고, 화가와 조각가들의 화실을 다니다가 20세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하였다. 1943년 데이코쿠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때 그는 전통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전통 문인화, 민화, 벽화의 도상을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시켰다.

 

1949년에는 김환기, 유영국 등이 창립한 신사실파에 참가하여 작품을 출품하였고 1954년부터 6년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을 맡기도 하였다. 장욱진은 대부분 크기가 작은 작품을 그렸는데 작품의 밀도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일상적인 소재를 꾸밈없이 단순하게 묘사한 탓에 자칫 유아적으로 보이지만 치밀한 구성력과 세련된 색채, 그리고 특유의 밀도 높은 채색법으로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장욱진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일에는 타협하지 않았고 술을 좋아하였으나, 그림 그릴 때는 몇 년간을 마시지 않기도 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그의 올곧았던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공기놀이는 장욱진이 양정고보에 재학 중 조선일보 주최로 하는 제2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사장장(최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집안에서 화가의 꿈을 인정받게 된다. 이 작품은 장욱진의 대표적인 초기작으로, 그의 서울 내수동 집을 배경으로 가족의 시중을 들던 여인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비록 얼굴 등 세밀한 묘사는 생략하고 있지만 아이를 업은 소녀를 포함하여 인물의 자세와 동세가 매우 정확히 표현되었고, 구도 또한 잘 짜여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치밀하게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방법은 장욱진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화가 박상옥(1915~1968)이 좋아해서 갖고 있게 되었는데 박상옥 사후 유족이 발견하고 장욱진의 확인을 받아 서명을 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된 듯하다.<=박미화>

 

 

 

박래현-여인, 94×80.3㎝ 종이에 채색, 1942.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래현(PARK Rehyun,1920~1976)

박래현은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여성화가 중 한 사람이다.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부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제22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단장으로 총독상을 수상하며 재능을 드러냈다. 귀국 후 1946년 서울에서 최초의 규수화가 개인전을 열었고, 운보 김기창과 결혼하여 부부 동양화가로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전쟁기 피난 생활 중에는 일본에서 익힌 도회적 색채의 여성인물화풍을 벗어나 입체파를 수용한 새로운 동양화를 모색하여 조형적 탐구를 해나갔다.

 

1956년 제8대한민국미술협회전과 제5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른아침노점을 통해 회화적 결실을 맺었다. 1957년 백양회에 참여했으며,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상미술로 전향하여 동양화의 현대화를 위해 도전을 거듭했다. 1967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판화와 타피스트리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한동안 판화작업에 몰두하면서 활발히 작업활동을 이어갔지만 1976년 간암으로 급작스럽게 타계하였다.

 

 

 

박래현-여인. 사진=권동철.

 

 

여인은 미술학교 재학 중에 그린 작품이지만 안정된 데생력과 섬세한 감정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박래현의 초기 여성 인물화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940년부터 60년대까지 여인은 박래현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소재였다. ‘여인에서 등을 비스듬히 보이며 수심에 쌓인 듯 앉아 있는 여인의 자태는 맑고 담백한 채색으로 인해 더욱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른손에 든 종이학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림을 그린 동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김은주>

 

권동철=242022.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