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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巨人-이해랑(李海浪)(30)‥우주처럼 광대하게 사유하고 별처럼 작게 표현하라!, LEE HAERANG, 대한민국 배우 겸 연출가 이해랑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9. 4. 2. 00:22


영결식



이해랑은 1980년 중반부터는 방송 출연이라든가 신문·잡지 인터뷰 때도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대체로 1984년 봄부터였다. 가령 그는 19843월 독서신문(讀書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인생 70이면 짧아요. 이제 서서히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야 되고 세상을 하직할 마음의 준비도 있어야겠지요. 현실의 생활을 정리해 두면 죽음이 무섭지가 않아요. 현실에 대해 인간적으로 빚이 없으면 저쪽 동네(저승) 이사 가듯이 홀가분하고, ‘내일 봅시다하면서 떠날 수 있어요라고 응답한 적이 있다.

 

이때부터 그는 동료들이나 후배 연극인들과의 주석에서 저쪽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그러나 가볍게 내뱉듯 던지곤 했다. 이해랑은 한 에세이에서 근 오십 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아내와 서로 주고받는 대화도 이젠 신선한 얘깃거리가 없다. 밑천은 바닥이 나고 서로의 잔소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꼈을 때의 감격도 벌써 옛날에 사라졌다. 또 새로운 것, 그것도 지나고 보니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던가, 그렇지 않으면 이전에 이미 원칙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것들이며, 후세인(後世人)들은 단지 죽은 진리에 배우처럼 새로운 분장을 한 것에 불과한 듯싶다.

 

노년의 외로운 생활 중에도 이따금씩 친지와 제자와 그 밖의 손들이 찾아와 말벗이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함께 살아오면서 이제는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크게 들리는 아내가 옆에 있다. 그러나 황천길에는 아무도 없다. 외로이 혼자 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가 내심으로 이승의 의미 있던 모든 것, 사랑하는 아내와의 달고 쓴 추억까지도 서서히 정리하면서 현실 생활에서는 더욱 홀가분했던 것도 같다. 따라서 그는 만년의 작품들인 <황금연못>, <들오리> 등 무거운 작품들로 자신을 불태웠고, <뇌우>에서의 불꽃은 더욱 빛났다.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오직 작품 연출에만 심혈을 쏟았다. 오히려 의욕만은 연륜을 뛰어넘듯 강렬했다. 이런 그에게 중요한 연출 의뢰가 온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부부의 한가로운 한 때



혼신의 정열 연습에 쏟아 붓다

1989년 신춘 벽두에 중앙일보사로부터 호암아트홀 개관10주년기념 기획공연 연출 의뢰가 온 것이다. <햄릿>은 그가 40여 년 동안에 다섯 번이나 연출한 손때 묻은 작품이기 때문에 흔쾌하게 받아들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평소 아껴온 젊은이 가운데서 리얼리즘을 이해하는 채윤일을 보조 연출로 해서 두 달여 간의 연출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이 19892, 추위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늦겨울이었다.

 

그는 사업하는 차남이 마련해준 삼성동 사무실에 매일 나가서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집필준비를 하는 한편 <햄릿> 연출 플랜도 구상하는 등 대단히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워낙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오후부터 시작되는 연습은 매일 밤에나 끝나곤 했다. 하루에 6시간씩 매일 계속되는 연습은 젊은 배우들마저 지칠 지경이었다. 그는 마치 마지막 대작이라도 만들어내려는 듯이 열정을 불태우듯 작업을 진행했다. 그가 너무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서 연습 분위기는 공연 못지않을 정도로 적요 그 자체였다.

 

노대가가 워낙 혼신의 정열을 연습에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노년 건강을 걱정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가 전성기 스타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도저히 출연이 불가능했던 유인촌을 불러 이번이 마지막이야!”라고 애소(哀訴)하다 시피 하여 마지못해 출연했다는 사실에서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유인촌은 스승의 그 마지막이라는 말이 단순히 연로하심으로 인한 체력 때문으로 생각 했었고, ‘정말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돌아가시는 당일 날에는 웬일인지 연습을 일찍 마치시고 너희들끼리 마저 하고 가, 나는 약속이 있어라고 자리를 일어나셨으며 우리는 선생님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 합니까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프로그램을 위한 스태프 캐스트의 사진을 찍는 날로서 선생님께서는 이번 기회에 영정(影幀) 사진도 하나 장만해두어야겠어, 내일은 넥타이 매고 올 거야라고 하시면서 연습장을 떠나셨다고 회상하였다.

 


           이해랑의 달에 참석한 김종필 총리



머나먼 여정

198942일 저녁 모임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3형제 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 함으로써 그로서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 자식 자랑을 자주하고 행복에 겨워했다. 그는 그날도 자녀들과 함께 인생의 전성기를 만끽하려는 듯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다. 평소에 즐기는 맥주를 과음할 정도로 마시고 귀가했던 것 같다. 그는 행복한 숙면도 취했다고 한다.

 

그는 이튿날(43) 새벽 여느 날과 다름없이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이다. 화장실 바닥이 미끄러워서 쓰러진 줄 안 가족들은 급히 그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집에는 그를 항상 모시고 다니는 나이 지긋한 자가용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병원으로 이송되는 차중에서 그는 기사에게 들릴락 말락 하게 , 그동안 잘 살았어, 이제 그만 가면 됐지라고 유언(?)을 한 것이다. 이 유언은 그 노인 기사 외에는 누구도 못 들은 것 같다. 급보를 받고 황급히 달려온 자녀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부친이 의식을 완전히 잃었을 때였다.

 

그는 4810시 향년73세로 고통과 영광의 생애를 마감하고 영원하지만 낯선 세계로의 머나먼 여정에 올랐다. 평소 그는 죽은 뒤에까지 뒷소리를 듣는 것이 그야말로 죽기보다 싫다는 말을 이따금 했는데, 그런 신념을 스스로 실천한 셈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햄릿> 연출을 거의 다 마무리 짓고 개막 일주일 을 남긴 채 죽은 뒤의 뒷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홀연히 떠나버렸다. <>


[정리:권동철] 2019년 3월6일 데일리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