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40㎝
간간히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시큰둥하게 나뭇잎을 흔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어스름 새벽의 골짝안개가 귀찮은 듯 몸을 돌리는데 꽃잎에 달린 한 방울이 톡하고 콧등에 떨어졌다. 이건 무슨 향이지? 호르르 새떼들이 지나간다. 잎 사이를 뚫고 거침없이 들어온 이른 아침 한줄기 빛이 계곡의 산뜻한 물줄기에 부딪히며 산산이 흩어졌다. 그때였다. 어디서 이리도 애절한 가락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꽃이야 시들지 말라 네가 떨어지면 임이 오지 않아. 낙화유수라! 이 봄 경치에 정분의 품속에 파묻힐 때까지 꽃이야, 꽃이야….’
마젠타핑크 진달래가 푸름 속에서 피어난 듯 봄 동산을 물들인다. 탐스러운 꽃송이는 발랄하고 눈부신 햇살이 꽃잎을 스치자 보들보들한 순정의 심사를 수줍게 엿보였다. 하늘은 남빛. 적막이 숙연한 마음의 자락을 적시는 술시에 창백한 언약을 손에 꼭 쥔 채 누구를 마중 나왔을까.
◇꽃송이, 우연과 단순화
작가는 지난 1998년부터 한지에 꽃을 비롯하여 산하풍경을 펼치고 있다. 기운생동, 무위자연(無爲自然), 무계획의 계획, 우연 속에서의 필연 등 화법이 한국적 수묵작업과 일치된다는 관계성에서 색채의 강한 대비형태의 확실한 단순화 그리고 서정적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
화면은 거침없이 호방하게 뻗어가는 굵은 선(線)이 건저 올리는 명쾌한 개방성이 전해져 온다. 이를 두고 작가는 “자연을 닮고자 대나무를 이용한 죽필 등 거친 붓을 쓰고 작업하기 전까지 오래생각하고 자연과 꽃을 돌아아니며 감상하는데 그러한 생각들이 모아질 때 자연의 이치대로 표현하는 것이 장기다”라고 말했다.
Flower No Flower-꽃과 인생, 70×140㎝, 한지위에 먹과 채색, 2010
팽팽한 힘이 분출되는 이미지는 세련미 넘치는 고혹적인 맵시의 꽃이라기보다 조금은 어눌한 말투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그것은 ‘Flower No Flower(꽃이자 동시에 꽃이 아닌)’ 역설적 뉘앙스의 명제를 상기시키고 동시에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우연의 표현은 ‘나와 너의 모습’ 같기도 하여 매우 흥미로운 공감연대를 이끌어내는 여지를 선사한다.
또 꽃봉오리가 확 터지면서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그 신선한 충격과 넘치는 희열의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발묵, 파묵 등의 기법은 한편으론 한국인의 ‘빨리빨리’ 의식구조와 많이 닮았다. 이러한 생생한 감흥표출은 ‘꽃과 인생’이라는 부제처럼 예술도 인생도 나아가 우주만물의 무량한 질서를 함의한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지우고 종이를 뒤집고 배접하고 우연히 발견한 꽃의 얼룩을 다시 그리고 정을 주고 키우면 어느덧 사랑스런 꽃송이들이 수놓인 한지를 발견한다. 완전하지 못하고 소박하지만 진솔하여 마음이 가는 표현에서 생의 굴곡을 이겨내고 또 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꽃이 만들어지곤 한다. 가까이 보면 점, 선, 면 물감 덩어리뿐이나 멀리서 보면 꽃이 보인다”라고 전했다.
화가 안영나
한편 청출어람, 남색치마저고리, 쪽빛바다처럼 청색을 주요색으로 즐겨 표현하는 한국화가 안영나(Ahn Young Na) 작가는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현재 충북 청주시 소재, 서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사아트센터, 선화랑, 상하이아트살롱 등 국내외 초대개인전을 20회 가졌다.
그에게 화가의 길에 대해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독하고 외로운 인생을 동행해 주는 작품을 보여주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다. 나의 꽃 작품 역시 다채로운 아름다움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기를 소망한다.”
△글=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주간한국 2016년 5월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