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지면기사

〔갤러리 라메르〕류영신,개인전,5월4~10일(서양화가 류영신,The Forest-Black Hole,피에르 에마뉘엘,Pierre Emmanuel,류영신 작가)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6. 4. 21. 00:47



The Forest-Black hole, 130.3×130.3, Mixed Media, 2016 ADAGP





그곳은 고요의 대지 잠잠한 바다. 미네랄이 발산하는 현란한 윤기가 이곳저곳에 부딪힌다. 묵직하거나 때론 순백에 남겨진 첫 발자국처럼 생생한 빛깔은 강렬하고 얼음장 같은 촉감의 바닷물이 물거품을 몰고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 응결된 자국에 드러나는 대자연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이를테면 동굴틈새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 미로의 연결고리를 비추는 유려한 곡선은 생경한 물체의 윤곽들을 서서히 드러낸다. 화면은 사물을 확대해 제시하는 클로즈업처럼 뭔가 곧 대자연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질 직전의 미스터리하며 불투명함을 자아내는 흡인력으로 묘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미지들은 언뜻 규칙적인 배열결정구조의 원소처럼 유사하게 보이지만 유기적 체계의 사변적 뉘앙스를 풍긴다. 예측 불가능한 현상 속 카오스의 질서처럼 흘러내리거나 깎이는 등 미세한 이동이 포착되는 그 울림은 어떤 징후를 감지하게 한다. 고목의 숭숭 뚫린 구멍 또는 수직으로 깎여진 암벽 속에 곧 지표로 쏟아질 마그마나 끝이 보이지 않게 분출할 것 같은 불덩어리가 꿈틀대는 고요처럼. 동시에 거대한 화산 폭발이 원시림을 뒤덮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침잠해 있는 듯 변동에너지를 품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시간의 무한성을 목격하도록 인도한다



 

   

60×60





검은 색채위에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번들거리는 빛은 화면의 고고함을 더욱 끌어 올린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선율 그 광활한 감정의 중저음이 느리게 지나간다. 이 추상적 심상은 생사의 허무마저 놓아 준 그루터기에 한줄기 바람을 불러 세월의 책장을 스르르 넘긴다. 작은 돌 틈 사이 톡톡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부유하던 꽃씨가 내려앉는다. 육중한 우울을 딛고 피어난 매혹의 꽃잎은 아름답지만 슬픔이 배인 쇼팽의 피아노 선율에 눈시울을 붉힌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양대지를 품을 수 있는 것인가. 차라리 그것은 완전한 해방감으로 차오른 침묵, 햇살이 쏟아져 조금씩 뾰족하게 드러나는 활력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래전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저서 불의 정신분석/초의 불꽃에서 <밤 이슬은 벽을 가볍게 하고/인류를 모공(毛孔)으로 하며/대지를 움직인다.>라는 피에르 에마뉘엘(Pierre Emmanuel)목자와 왕자라는 시를 만났었다. 한 방울 이슬이 대지를 움직이게 하는 정신의 힘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때부터 ‘The Forest-Black Hole’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는지 모른다라고 피력했다. 숲이 비바람에 흔들리지만 하늘을 향해 곧고 바른 성장을 지향하듯 인간의 원초적 내면을 그곳에서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다.




   

130.3×130




, 궁극의 평화와 치유

파란 불꽃으로 타오르던 용암은 검푸르게 굳어 스스로 내부의 열기를 뿜어냈다. 토해낸 밀림의 뿌연 수액이 콸콸 호수로 흘러들어 서로 엉키며 녹아 응고된 해맑은 우윳빛 흔적은 맑고 심오한 정감으로 밀려든다. 화면은 대자연의 거대한 용틀임 후의 달빛정경, 폭우가 쓸고 지나간 뒤의 허망한 흔적, 눈 쌓인 적막의 자국을 절제와 응축미학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꽃과 새와 동식물을 포용함으로써 궁극의 평화와 치유를 선사하는 숲에서, 광대한 우주의 불가사의를 통찰하고 싶었다. 긴긴 세월 한민족역사와 궤를 같이해 온 닥나무를 오브제로 숲에 대한 일련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드러나거나 안 보이는 숲의 형성을 통해 가 우주 한복판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 한편 이번 류영신(RYU YOUNG SHIN) 작가의 스물여덟 번째 개인전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 갤러리 라메르(Gallery LAMER)에서 54~10일까지 열린다.

 

 

 

 

=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주간한국, 2016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