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서정적 풍경-6
먹의 농담, 강렬한 채색은 빛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빛과 함께 있는 자연에 대한 숭고함의 표현과 동일한 선에 놓여 있다. 그래서 동양회화의 빛은 대상의 내면에 녹아있다.
단색 톤의 유지, 색채 변주의 서정성이 마치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허정화의 작품세계에서 빛과 자연의 그 아름다움의 경지를 따라가 보자.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미대 교정.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라는 지명 청파(靑坡)처럼, 100주년 기념관 앞 푸른 잔디위로 가늘고 선명한 오후의 가을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막 강의를 마치고 서둘러 나온 들꽃 같은 은은한 단색 옷차림의 진주 출신, 허정화 작가를 만났다.
빛, 색채의 미묘한 변조
빛의 환영에 목말라 했던 서구인들은 동양회화의 강렬한 채색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던 빛을 발견하였다. 허정화 작가가 사용하는 한지, 먹, 동양화 채색물감은 그가 한국화가 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빛에 대한 분명한 존재의식은 그가 서양회화의 원류에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크기의 반투명한 색면을 가지고 대상과 대상, 대상과 배경, 배경과 배경을 서로 서로 중첩시키면서 색채(빛깔)를 미묘하게 변조시킨다. 작가는 빛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재현된 형상은 화면의 우측이나 상단부분에 자리를 차지하여 눈길을 끈다. 이 형상들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마치 깨어진 창이나 찢어진 망사를 통해 저편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어떤 부분은 극사실적으로, 어떤 부분은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다.
김현화 숙명여대 교수는 “허정화 작가가 색면 위에 간간히 덧붙인 짧은 선과 빨강 분홍 등의 작은 붓 터치는 나뭇가지와 그 끝에 매달려 있는 열매나 꽃봉오리를 연상시키면서 그의 회화가 자연의 풍경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경계선, 무애한 소통의 빈틈 같은
작가는 언제나 경계선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한지위에 반투명한 색채를 겹쳐놓은 착색 기법이 이를 뒷받침 한다. 빛이 자연과의 무애(無碍)한 소통을 열어주는 것이라면 경계선은 마치 빈틈처럼 무엇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시각과 비시각, 침묵과 음향이 공존하는 회화를 하고자 한다. 눈으로 본 자연 풍경, 귀로 듣는 자연의 소리, 마음으로 느낀 자연에 대한 인상이 고스란히 담겨지는 회화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해바라기는 여름과 가을의 경계선에 있는 꽃이며, 낙엽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있다. 그러나 그의 가을은 늦여름이 남아있는 추석 무렵의 초가을, 즉 경계선에 있는 계절이다. 작가는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회화에서 자연은 욕망하지만 소유할 수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결핍으로 남아있는 가슴속 신비이고 화상이라는 것을. 이렇듯 허정화 작가는 한국화의 전통적 재료, 기법, 화론을 현대미술로 번안하기를 원하며 동시에 현대미술을 한국화에 접목하기를 원한다.
■허정화는 누구…
숙명여대 회화과 동양화 전공 및 동대학원 졸업.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 수학. △개인전 13회=예술의 전당(서울), 시드니 아트페어(호주), 한국 현대 미술제(서울), 밀라노 아트페어(밀라노 이태리), Naaf(일본) 등. △단체 및 초대전=레드 앤 블루(인사아트센터), 물과 바람 그리고 생명전(주일 한국문화원 일본),한미국제교류전(워싱턴 미국), 숙원전(청파갤러리), K.P 국제교류전(필리핀 마닐라),국제선면전(일본 동경도 미술관) 등 다수. 숙원회 회장, 숙명여대, 대구대, 대진대 출강.
△스포츠월드 2008년 9월19일 김태수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