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이원신
필자가 1990년 후반 이태리 로마에서 우연하게 구입한 LP음반이 하나 있다. 1960년대 이태리 소프라노 로마나 리겟띠(Romana Righetti)가 부른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가 그것이다.
오페라 주인공 비올레타 역할의 노래를 리겟띠는 소화해 내고 있는데 네 장의 음반으로 구성된 하나의 세트는 고스란히 ‘라 트라비아타’ 1~3막 전곡을 담고 있다. 1막에서 비올레타 를 자유분방한 목소리로 2막에서는 성숙하면서도 지조 있는 여성의 내면을 끌어올리며 3막은 죽음을 기다리며 사랑했던 남자 알프레도와 함께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는 듯 회상하고 있다.
이 중에서 매번 들을 때 마다 특히 필자를 감동시키는 것은 3막의 ‘지난날이여 안녕’으로 번역되는 ‘Addio del passato’ 부분이다. 비올레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면서 노래하기 전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은 가히 리겟띠 연기의 백미(白眉)다.
쉼표 하나까지도 감정표현을 완벽하게 이입함으로써 그 대사만 들어도 절망과 가슴 깊은 곳에서 몸부림치는 생(生)의 욕구가 교차하는 여주인공의 심정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터져 나오는 '에 따르디(E` tardi)' 즉 ‘늦었다’라는 탄식 한마디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없는 완벽한 리겟띠의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유럽 여러 나라로 이동이 잦았던 때, 한 동안 잊고 지내다 지난 2010년 체코 프라하 오페라 극장에서 필자가 비올레타 역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그 당시 연습과정에서 불현듯 이태리에서 샀던 음반이 떠올라 다시 듣게 되었었다. 리겟띠와 같은 역할로 곧 무대에 설 나에게 전체 오페라를 응집하는 짧지만 강한 한마디, 바로 리겟띠의 'E` tardi'는 당시 역할을 풀어가는데 많은 착상(着想)과 교혼을 주었었다.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최근 다시 그 음반을 듣게 되었는데 리겟띠의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전율시키는 마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출처=이코노믹리뷰 2013년 9월16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