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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EE YOUNG〕 서양화가 현지영 | 꽃이 피는 건 완벽한 중심을 의미 (현지영 작가, 화가 현지영)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5. 20. 08:48

 

130X162.2cm

 

 

 

소낙비 지나간 어스름 저녁. 맹꽁이 울어대는 집 앞 논둑에 친구랑 나란히 앉아 별 총총 밤하늘 보았었지. 어린것은 무릎에 잠들고 창밖을 바라보니 까닭 없이 반달이 빙긋 웃네!

 

하늘색 물망초 꽃이 긴 머릿결에 다가와 단아한 향기를 물들였다. 아롱아롱 흩날리는 꽃잎. 안개 헤치며 눈부신 햇살이 강물을 적시면 물색 꽃들은 하나 둘 핑크빛으로 스몄다. 신열(身熱)로 창백해진지 며칠.

 

어질하여 쉬이 못 일어나 노심초사인 때, 흙 담벼락 아래 키 큰 카사블랑카 백합이 기꺼이 등을 빌려줬다. 꽃등에 얹혀 너무나 황홀해하는 소녀. 어디로 갔는지, 병마가 사라졌다.

 

 

 

   

Gift, 162X130cm mixed media, 2012

 

 

 

목이긴 초식동물이 안개 피어난 들길을 머뭇하다 조용히 다가와 순하게 스친다. 상큼한 냉기의 투명하고 풋풋한 초록 숲 기운이 깊은 호흡으로 이끌었다. 자귀나무 가지에 둥지를 튼 새들이 나무의 열매가 콩처럼 잘 자란다며 일러줬다.

 

그리고 포르르 날아가며 홍색 꽃은 또 얼마나 예쁜 걸요라며 힐끗 쳐다보았다. 밤비 내린다. 서로가 짝을 이룬 길쭉한 잎들. 비를 막으며 오가는 깊은 눈길. 여린 꽃잎들이 순백헌신으로 젖은 슬픔을 위로했다.

 

얼굴이 타서 하얗게/부서지는 파도를 닮은/이빨만 하얗게 해변에 부려놓은 소녀야 아홉 살 열 살 소녀야/올해도 숭어가 무지하게 띈다”<이윤학 , 남당리 소녀>

 

 

편지, 꽃의 화답

또 하루. 아침 산책로엔 은근하면서도 상큼한 자극적 향기가 숲길 가득 피어올랐다. 천사같이 하얗고 샘물처럼 맑고 선명한 연두색 꽃술의 카사블랑카 백합들이 한꺼번에 만발했다. ‘가늘고 긴 꽃대에서 이렇게 크고 탐스러운 여러 꽃송이를 피워 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가벼운 독백, 경쾌한 산보를 즐길 때 꽃이 소식을 전해왔다. ‘종종 꽃송이의 균형에 대한 관심을 지나칠 때가 많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꽃이 피는 건 완벽한 중심을 의미해요. 사랑이라는 것. 꽃과 다름없다는 것. 마음의 친애(親愛)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130X162.2cm

 

 

 

당당해서 더욱 아름다운 답신이었다. 하얀 꽃종이, 매끄러운 잉크의 펜을 들고 실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무척 호감이 갔었죠라고 쓰려다 맞아요. 꽃이 되고 싶죠. 당신처럼이라고 적었다. 바람은 일다 넘어갔다, 다시 부풀었다.

 

그러다 휙휙 소리 내어 불면 풀들은 군무(群舞)하듯 물결치고 대지는 웅대한 울림으로 뭇 생명들을 껴안았다. 빨간 우체통이 겸연쩍게 홀로 두리번거린다. 화답이 도착했나 보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장석남 , 옛 노트에서>

 

 

 

 

 

 출처=-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262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