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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영박 | 서걱대는 억새 숲 언덕 돌아보니…을숙도 가을서정(LEE YOUNG PARK, 서양화가 이영박, 이영박 화백, 이영박 작가)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5. 3. 23:32

 

 

심상의 소리-을숙도B=130×162Oil on canvas, 2009.

 

 

 

하필이면 왜 생명을 소진한 갈대와 억새꽃인가. 이들은 찬 서리 내리는 늦가을 쓰러질 듯 일어서는 굳센 의지의 존재감을 일깨운다. 곧 인간 삶에 비유되는 이유이리라.

 

낙조의 강물은 비취빛처럼 맑았다. 바다를 넘어가는 노을은 연노랑 색깔로 낮밤 경계를 느릿하게 배회했다. 갈대 숲 우묵한 강가에선 바닷물과 강물이 뒤섞여 비릿한 물 냄새가 유적서 발견한 오래된 서적처럼 켜켜이 쌓여져 갔다. 수척한 억새는 야윈 신음처럼 바람이 지날 때마다 공중에서 하나, 둘 말()을 꺼내 쥐어주었다.

 

그는 영토(領土)에서 곧 머나먼 항해를 떠날 사람들에게 안전을 당부하느라 분주했다. 다갈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강변 마른 잎들은 이리저리 뒹굴며 행로를 정하지 못해 더욱 쓸쓸했다. 저녁바람에 실려 빈손으로 돌아온 허기진 갈매기는 퀭한 눈동자 속에 답신을 담고 돌아왔다. ‘애써 답하지 말라. 하룻밤 아니 버려진 사랑이라더냐?’

억새꽃 통증이 어둑한 잿빛 허공에 미련처럼 날렸다.

 

 

 

    심상의 소리-을숙도A=130×162Oil on canvas, 2009.

    

   

 

, 단장(斷腸)의 고통처럼 이별은 오고 찬바람 냉랭히 훑고 간 은빛 머릿결에 가을이, 가을날이 저물어 갔다.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간다.”<릴케(Rainer Maria Rilke) , 고독>

 

황토 흙길엔 나란히 걸어간 바다새 발자국이 아직 선명했다. 이리저리 바쁜 몸놀림인 참새의 망중한(忙中閑)에 홀린 피라미는 허망한 추격의 수고를 하고 있었다. 무심히 물고기를 바라보다 서걱대는 억새 숲 언덕 돌아보니 홀로 남겨져버렸네.

 

사랑도 물처럼 불어나 한 아름 안고 빙그르르 춤추고 싶었던 시절. 멀리멀리 그대와 달아나고픈 밤엔, 가을비 왔었네. 물 위엔 띄어 보낸 작은 새 한 마리 그림. 새처럼 물처럼 따라가지, 묻지 마오. 서로가 반해 울리는 쓸쓸한 가을찬비 속 뜨거운 키스여, 숙명(宿命)의 강이여!

 

 

 

   

자연-갈밭소리, 41×53Oil on canvas, 2011.

 

 

 

물은, 유랑(流浪)처럼 흘러야 푸르러지는가. 갈잎은 속살까지 수직으로 찢어 신열처럼 생애를 토해내는데 사랑은 가을이 익기 전에 낙엽 되어 너무 애처로워 차라리 눈을 감네. 쓸쓸한 흙먼지 회오리 기웃거리는 이 모퉁이 돌면 부산한 몸짓으로 출렁이는 바다. 오오! 으르렁대는 바람에 곧 비가 내리겠지. 휘날리는 꽃송이 흩어지는 중년의 은빛 메아리.

 

말간 손등 내밀어 천진한 웃음을 짓던 너를 이제, 잊을 것이다. 그러니 슬퍼마라. 지금은 감사의 계절. 이 가을의 노래는 브람스(Johannes Brahms)의 첼로,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Requiem).

 

 

 

출처=-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11124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