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자라다, 60.5×72.7㎝ 광목위에 혼합재료.
식물이 물과 빛의 자양분으로 자라듯 화면의 종이 콜라주는 물감 같은 재료다. 그 위에 풀어낸 소담스러운 언어는 광목천(廣木) 위에 어우러져 빛의 의미로 환원된다. 이것이 그녀가 빛을 심는 이유다.
은막(銀幕)처럼 사르르 연분홍빛 커튼이 열렸다. 뜰 안,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저마다의 결실들이 수줍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형체도 없는 한줄기 바람이 나그네 이야기처럼 무심히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블루마운틴 커피 향이 잠시 동그랗게 코끝에 머물다 허공으로 날아가 조금은 쓸쓸한 아침을 열었다.
숨길 수 없는 가는 떨림의 여운이 아직도 맴돈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려 저승의 신(神)께 애원하는 남자의 우수에 젖은 절규. 신화(神話) 이야기는 안쓰럽고 그런 사랑에 전율이 돋았다. 짠한 리듬이 묻어 찰랑이는 찻잔. 잰걸음으로 다시 음반을 얹는다. 평화로운 호흡으로 음악이 파고들었다.
빛-열리다, 45.5×53㎝ 광목위에 혼합재료.
“냉혹한 운명이여. 이 얼마나 가혹한가. 내 불행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내 고통을 견딜 수가 없구나.”<글룩(C.W. Gluck)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중> 수채화 같은 햇빛들이 무리지어 거실은 순식간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울긋불긋해졌다. 해맑은 그림자들이 깨운 사색(思索).
뜰 안, 이삭껍질은 오롯이 빛들을 감싸 열매를 잉태하곤 어느새 황색의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겸손의 시간을 위한 여행 채비는 그렇게 조용한가.
◇한 알의 씨앗이 풍성히 자라 난, 기적
이슬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영근 연록의 꿈을 녹여 그가 마련해 준 따끈한 찰옥수수 죽 한 그릇이 식욕을 돋웠다. 잡다함을 거둬낸 노란 결정(結晶)의 한 스푼을 들다 “한 알의 씨앗이 이렇게 풍성히 자라다니, 기적이 아닌가”라고 감탄했다.
비가 잦아든 새벽에 쓰다만 소록(小錄)의 편지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부디 이 우연(偶然)의 흐름이 폐허에 닿지 않기를….’ 문득, 말로 할 수 없는 그리움이 불안의 파편으로 흩어져 젖은 대지 위에 찰박찰박 거린다.
누군가 바쁜 걸음으로 지나갔나, 거리엔 노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얼마만인가. 잠시나마 홀로 이리저리 여유롭게 거니는 소요(逍遙)의 시간이.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매만지고 얼싸안은/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조은 詩, 생의 빛살> 팔짱을 낀 채 남자에 기댄, 그를 받치듯이 서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여자. 진정 깊고도 푸르러야 낙엽과 바람과 눈물을 뜨겁게 껴안을 수 있는 것인가!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1년 10월13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