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맨드라미, 90.9x60.6cm Oil on Canvas, 2010
배경이 생략된 검은 바탕화면. 극렬한 태양빛 머금은 식물이 산을 타고 내려온 밤공기에 노출돼 있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교차되는 긴장! 저기, 맨드라미가 도도하게 내뻗고 있다.
외롭다. 오늘도 바다로 날아간 물새 한 마리 오지 않는 강변의 저녁은. 물굽이 휘감아 서해로 흐르는 수면 위엔 그리운 안부를 써내려가듯 누군가의 하모니카 소리가 꽃잎처럼 떠갔다. 입김의 긴장이 팽팽할수록 애잔한 음률은 바람결에 멀리멀리 퍼져만 가고….
장엄한 일몰(日沒)의 들녘과 강을 가로질러 날아온 빨갛게 익은 몸통의 고추잠자리는 선율에 쏠려 쉬이 떠나지 못한 채 빙빙 맴돌고만 있었다. 추수 끝난 들길을 가벼운 어깨의 가축이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나가는 하구 둑엔 둥그런 달무리와 붉은 노을이 영혼의 휴식에 관한 짧은 안부를 나누면 풍경은 시시각각의 채색(彩色)으로 물들어 갔다.
◇사랑·용서·화해를 부르는 ‘오마주’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泡沫) 같은 한 됫박 달빛이 소년을 꽃밭으로 초대했다. 그곳엔 명랑한 기쁨들의 파티가 한창이었다. 푸르스름한 조명을 받은 노랗고 빨갛고 자주색으로 무르익은 맨드라미들은 저마다 우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을밤 맨드라미, 90.9x65.1cm Oil on Canvas, 2011
그때 수줍어하는 손 등 위로 가벼운 키스를 하며 반갑게 맞아주는, 강변에서 애타게 기다렸던 백학(白鶴)을 보자 커다란 두 눈을 껌벅이다 그만 앙앙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긴 백야(白夜)의 성(城)이지. 박명(薄明)의 부드러운 빛은 용서와 화해를 산란하구. 그러니 이곳에선 어떤 얘길 해도 안심이란다.’ 새는 간호사처럼 능숙하게 위로했다.
잠시 후, 가장자리가 밋밋한 두툼한 잎을 나비와 귀뚜라미와 잠자리 등에 내어주는 문제로 토론하던 검붉은 꽃줄기의 좌장(座長)이, 결론을 내린 듯 낮은 헛기침을 하며 연설을 했다. “그곳의 수없는 생령들을/새로 태어나게 도울 수 있다면/정녕 아름다움이란 그것이다”<고은 詩, 겨울맞이의 노래>
가을밤 맨드라미, 90.9x72.7cm Oil on Canvas, 2011
이곳저곳에서 감동의 박수가 쏟아졌고 축하의 휘파람 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들뜨게 할 즈음 까만 바탕에 특유의 점박이 무늬를 새긴 기다란 실크코트를 하늘거리며 호랑나비 부인이 매우 감동 섞인 목소리로 답사를 읽어나갔다. ‘공중을 홀로 날아다니는 우린 새들처럼 날렵하지도 균형감도 좋은 편은 아니랍니다. 여러분의 튼튼한 잎은 늘 몸을 부풀려야 할 때 더없는 안식처예요. 배려가 없었다면 허공은 아마 수직의 암벽과 다를 바 없었을 거예요.’
축하공연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특히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보석처럼 푸르고도 하얗게 부서지는 황홀한 달빛 속을 비둘기 핏빛 같은 루비(ruby) 컬러 원피스를 입은 나비가 빨려 들어가듯 날아오르다 ‘이대로 녹아버릴지라도, 한 줌 검은 가루되어 가을밤을 헤매일지라도 오, 그대여 그것은 찬란! 나는 후회 없이 선택할지니.’라는 불타는 사랑고백에서는 일제히 꽃들이 매혹(魅惑)의 색(色)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소년은 보았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1년 10월27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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