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화가 오관진-심상을 일깨운 연민 ‘비움과 채움’ 연작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7. 6. 02:23

   

봄봄봄, 76×76장지에 혼합재료, 2009

 

 

 

작작(灼灼). 설중매가 제 무게보다 무거운 눈꽃송이를 이고 찬란하게 피어올랐다. 여린 꽃잎들을 누르는 절망의 시간에 오히려 더욱 더 선연히 빛깔을 뿜어내는 정신. 그 치열한 생명력이 틔어놓은 산기슭엔 노을만큼이나 붉은 속살이 흘깃 보이는 진달래 사이로 봄, 봄이 느릿하게 오고 있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매화는 자신이 피어난 세계에 온전히 스스로를 던지며 열정으로 타오른다. 백일 고운 꽃이 몇이며 대지의 품을 벗어나 피는 꽃이 어디에 있을까. 매화는 희망과 쓸쓸함, 꽃피우던 시절과 지는 세월의 외로움, 돌아오는 자의 귀로(歸路)와 멀어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그러한 모든 관계의 정의를 뛰어넘고서야 비로소 이 한겨울 한 송이로 거듭났다.

 

인생도, 사랑도, 그리움도 그러한가! 예찬에 연연해하지 않는 자연과 합일한 그 무위(無爲)에 이르는 통로는 꽃잎의 여린 겹이다. 겹은 꽃송이를 만들고 바람을 막고 꽃씨를 품는다.

 

 

 

  비움과 채움, 84×60장지에 혼합재료, 2009

 

 

 

참다운 선의 실천

 

한 가지에서 나온 매화 꽃송이가 여인의 방안 백자 달항아리에서 넉넉한 자애로 고독의 불꽃을 들여다 본다. 홀로이 갖추었고 홀로이 충분한 아름다움. 꽃은 완전한 세계인가. 하늘을 향하여 길게 솟구친 장삼자락이 미끄러지듯 허공서 내려와 어깨춤에 사뿐히 휘감기듯 매화 가지는 끊길 듯 끊어질 듯 왠지 모를 비감(悲感)을 불러일으킨다.

 

달항아리는 그지없이 희고 눈부시며 풍만하다. 회화이면서도 반 부조(浮彫)이고, 극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이며, 실경이지만 관념적이기까지 한 그림은 심상으로 받아들인 인간 근원의 연민과 사랑의 빛깔로 이끌고 있다.

 

작가는 상감기법으로 도자(陶瓷)와 그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들리지 않으나 들을 수 있는것에 대해 탐미해왔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고유의 매끈한 유기질감, 거친 손길로 빚어진 소박함, 전통적 맥락 아래 구현된 문양, 작금의 세태에선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정()마저 화면에 이식해 놓는다.

 

여기에 그는 참다운 선이랄 수 있는 인성의 본질까지 수용함으로써 관용과 포용이라는 감쌈의 실천을 행하고, 삶의 지향에 관한 철학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고 썼다.

 

그의 지난한 노력 흔적은 작품들을 실제 마주하면 사진의 평면에서와는 많이 다른, 볼록이 올라온 도자의 질감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관진 작가도 도자기의 수많은 균열들의 선을 손으로 일일이 그린다. 그것은 사물의 참모습과 진리를 비추어 보고자 관조(觀照)하는 자기침잠(自己沈潛)에 이르는 수행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오랜 시간을 이겨 뛰어넘어 온 살아 유지되고 축적되어 이룩된 깨달음과 교감하는 충만한 기쁨을 만난다. 그것은 흉내내기와 겉치레 등과 진작에 분별되는 울림이라고 확신해 왔다고 말했다.

 

 

 

 

비움과 채움, 84×60장지에 혼합재료, 2009.

 

 

 

한 송이 꽃, 그 향기의 미학

 

매화 한 송이가 방바닥에 살포시 드러누웠다. 햇살이 한지(韓紙) 문으로 가늘게 들어오면 그렇게 고고하던 꽃이 인적 없는 빈 방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그 한 송이 낙화의 일생은 더 바람 없는 채움 혹은 홀가분한 비움이었을까.

 

, 주인께서 주무시는 아랫목서 보이는 벽 족자(簇子)의 선시(禪詩) 한 수.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당나라 선사, 황벽희운(黃檗希運) 스님>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2011113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