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유택렬 탄생 100주년 기념전-④]샤머니즘적 자연관 현대미술의 대입 1960년대 중반~70년대 초[유택렬과 흑백다방 친구들, 경남도립미술관,Yoo Tackyul,劉澤烈,유택렬 화백,유택렬 작가,권동철]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25. 1. 2. 14:31

(위 왼쪽)돌멘(Dolmen) 44.7×60.3㎝ oil on canvas, 1963, 개인소장. (오른쪽)돌멘(Dolmen) 41.3×60㎝ 합판에 유채, 1973, 개인소장. (아래) 전시전경. 사진=권동철.

 

 

파아란 빛이 방안에 네모진 넓이의 그만치 슬품을 듸려놓았다. 까만 바닥이 말하지 않고 입체로 번진 빛이 숨을 거둔 밖으로 무한한 공간이 있다.<유택렬, ‘월광야’, 연도미상/전시장에 붙여있는 글>

 

◇돌멘, 시공을 연결하는 문

화가 유택렬(Yoo Tackyul, 劉澤烈, 1924~1999)은 1960년 한국적 추상을 모색하던 시기에 한국적 원형으로 우리나라의 북방식 고인돌을 소재로 한 ‘돌멘(Dolmen)’시리즈를 1970년대 중반까지 전개한다. 그는 탁자식 고인돌의 크고 평평한 덮개돌을 받히는 굄돌 사이의 빈 공간이자 고인돌 아래 무덤으로 이어지는 입구의 모양, 즉 사각 형태에 주목한다.

 

(위 왼쪽부터)돌멘(Dolmen), 87×69.7㎝ 캔버스에 유채, 1961, 개인소장. 돌멘(Dolmen), 51.5×63.5㎝ 캔버스에 유채, 1967, 개인소장. 돌멘(Dolmen), 39.2×28.7㎝ 캔버스에 유채, 1965, 개인소장. (아래 왼쪽부터)녹염(綠炎), 56.7×86.4㎝ 캔버스에 유채, 1969, 개인소장. 무제(Untitled), 90.5×116.5㎝ 캔버스에 유채, 1968,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죽은 자를 위한 공간, 비어있지만 채워진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 신비롭고 영활(靈活)한 실재로 그려진 ‘돌멘’은 삶과 죽음을 잇고, 시공을 연결하는 문으로 형상화된다. 또한 유택렬은 돌멘의 사각문양과 선에 옵아트(Optical Art), 미니멀 아트(Minimal Art)와 같은 현대미술의 조형적 경향을 대입하는 등 자신만의 조형성을 찾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시도한다.<‘유택렬과 흑백다방 친구들’전시도록, 경남도립미술관, 2024>”

 

(위 왼쪽부터)돌멘(Dolmen), 90.5×72㎝ 캔버스에 유채, 1969, 개인소장. 돌멘(Dolmen), 41.5×31.8㎝ 캔버스에 유채, 1969, 개인소장. 작품69(Work69), 59.5×53㎝ 캔버스에 유채, 1969,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아래 왼쪽부터)돌멘(Dolmen), 31.5×41.2㎝ 캔버스에 유채, 1969, 개인소장. 작품(Work), 53.2×60.5㎝ 캔버스에 유채, 1969,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한편 1963년 2월3일 진해미술협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유택렬이 지부장으로 선임되고 2월13일 진해 흑백다방 2층에 한국예술총연합 진해시지부 사무국을 개설하고 4월5일 제1회 진해 군항제 기념포스터를 제작한다. 이후 10년간 포스터 제작을 지속한다.

 

유택렬은 1969년 진해여고를 마지막으로 임시교사를 퇴직한다. 이후 흑백다방 2층에서 ‘유택렬 미술연구소’를 운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2월10일 마산 제일다방에서 ‘유택렬 개인전’을 개최한다.

 

조종식 조선대학교 교수, 유택렬의 제자/경남도립미술관 유택렬 전시영상아카이브, 영상사진=권동철.

 

 

◇삶의 세계 자아문제의식의 추구

“1950년대에 무속적인 내용을 카니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앵포르멜적인 작품을 그렸을 때는 구상적인, 추상적인 구성으로 이렇게 이루어 졌다면 60년대에서 70년대에 가면 ‘삶의 이전의 세계 또는 삶 이후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드려내려고 했을까’라고 하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돌멘’시리즈를 보면 허공에 물감을 이렇게 중첩시키고 이겨 개가지고 기운을 드러내려고 했다든가 이런 작품에서, 나중에 서체추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보거나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작업세계가 단절돼서 이어지지 않는다.’라고 보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실제로 내면으로 보면 철저하게 ‘자기 문제의식 속에서 추구해 오는 모든 과정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라고 볼 수가 있을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파악을 하고 감상을 할 때 유택렬 선생님의 작업의 참모습이, 본래의 예술세계가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조종식>”

 

박석원 조각가, 前 홍익대 교수, 유택렬의 제자/경남도립미술관 유택렬 전시영상아카이브, 영상사진=권동철.

 

 

◇독창적 전위성 그 새로운 열망

“1960년대 말, 70년대 초 그리고 70년대 넘어서면서 미술협회에서도 앙데팡당이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새로운 미술을 접목하는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줬어요.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 많이 집중하고 그랬던 시기인데, 그러면서 동시에 80대, 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현대미술제’라든지 ‘에꼴 드 서울’이라든지 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이 전개가 되기 시작했어요.

 

그때 중앙의 미술운동의 핵심이라고 하는 거는, 그런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사람들, 그 속에 진입하고자 하는 많은 작가들, 이런 분들이 많은 양식(樣式)을 가지고 시대를 점유했던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유택렬 선생님도 지역에서 똑같은 그런 행동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그런 샤머니즘적 의식이나 무속적 문제라든지, 아까 이야기했지만 원시적 미술의 문제 이런 것은 아주 기초적이고 독창적인 거예요. 마찬가지로 똑 같아요. 여기서도 70~80년대 중앙에서 있었던 움직임은 다 그런 것들이에요. 흔적이에요. 유물론적,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또 한편으로는 한국적인 것, 이런 것들을 부르짖으면서, 동양화에서도 그렇지만 그런 걸 구사하고 서양화 같은 경우에서는 아까 이야기 했던 앵포르멜이라든지 추상표현주의 그런 걸 다 넘어서 새로운 문제를 자연관을 통해서 구사를 한 때였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우리 미술의 역사라는 건 굉장히 짧잖아요. 60년대에 있었던 그런 유파들이 우리는 듣도 보지도 못한 그런 일들 이었고요. 그런게 8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에서부터 헤어나기 위해서 무단한 노력을 했던 때거든요.

 

같은 거예요. 유택렬 선생님도 나중에 보면 지역에서 했던 그런 일들이, 먹그림이라든지, 그 무속의 ‘부적에서’라든지 이런 타이틀에서 나오는 그림들을 보면 굉장히 전위성(前衛性)을 느낄 수 있다니까요.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샤머니즘을 이야기하지만, 토속신앙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순수한 자연관이 개입됐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거예요. 지금 보면 그래요.<박석원>”

 

[글=권동철, 1월1일 2025년, 인사이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