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없이 피는 꽃들의 시간
“마지막 날의 그림을 그린다. 마무리하던 나무를 지우고, 그 위에 모든 색깔을 다 지우고, 짧고 간단한 향기를 그린다.…편안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나무 옆에 서 있는 향기가 되겠지. 여기 있다고 말할 것도 없고 생각도 없이, 만질 것도 없이 밤낮으로 보고만 있으면 편안하지 않겠냐.”<그림그리기5, 마종기 시집-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刊>
하늘에 물고기가 떠 있는 듯이 보이는 물속풍경이다. 우아함의 미(美)란 이런 것인가. 한곳을 향해가는 아홉 마리 물고기 행렬이 비범한 응집의지를 드러낸다. 반드시 열(十)로 채워야 할 필요는 없을 듯, 조금 부족함의 미학과 동일하지 않은 묘사가 갖는 저마다 특이성의 에너지는 시·공을 훤하게 트이게 하는 상상력으로 유도한다.
이두섭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꽃은 멀리서도 향기가 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리. 그 느낌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고 또한 기꺼이 고맙게 받아들인다. 달처럼 보이는 원(圓)의 형태는 달은 아니지만 그러한 장식적 요소를 통해서 모나지 않은 자연을 의미화 하였다. 그러한 둥근 마음으로 나의 작품을 감상해 주시길 전달하고 싶었다.”
◇사소한 것들이 베푸는 평화스러움
화면은 유니크(unique)한 표현을 통해서 차별화를 분명히 하는 일련의 주체성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정확하게 꽃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기억속의 꽃을 기호화함으로써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작가는 주요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앞과 뒤가 분명한 꽃무리들은 평면회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입체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음이다. 정지시킨 시간의 겹들을 하나의 화면으로 집약함으로써 평면에서 보지 못한 입체감을 통하여 관람자에게 새로운 시각의 신선함을 경험하게 한다.
물론 여기엔 작가가 명명한 MLT(Multi Layer Technique)이라는 독자적 기법이 작용한다. 공업적결과물인 아크릴 패널이라는 질료의 양태(樣態)를 응용하여 한 단계씩 그 위에 구분되어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풍경화 등 평면회화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이 구분된 색으로 원근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두섭 회화는 개별의 레이어에 채색된 겹들이 하나로 조합되면서 화면 깊숙이 살아있는 생명들이 어우러지며 우러나오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는 꽃밭인데 애매한 상황을 만들어 놓았거나, 한가지로 결론되어지지 않는 의미의 스펙트럼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그림을 보는 관자(觀者)가 주인이 되게 리드한다는 것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상과 물속의 경계가 없는 풀과 꽃들의 생기(生氣)에서 무한한 정신의 세계로 확장하는 상상의 모티브로 이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이는 곧 작가의 순수한 자유의지의 산물로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로써 화폭에선 깊고 풍성한 시각미의 따듯함이 배어나온다.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심미주의로 이끌어 냄으로써 사소한 것들이 주는 평화스러움과 심원(深遠)한 뉘앙스를 드러낸 이데아의 형상을 동시에 구사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글=권동철, 인사이트코리아, 2020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