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닐다, 44×102㎝ 천에 채색, 2017
해맑은 자연의 운치 충만한 자아
“화단은 벌써 흙 부드러워져 봉긋 솟는다 저기 종꽃이 흔들린다 눈처럼 하얗게. 사프란은 이글이글 세찬 불을 한껏 피우고 에메랄드 빛으로 싹이 튼다 핏방울처럼 싹트고 있다.…저기 눈길이 이글거린다 나에게 늘 흥분시키는 노래 명랑하게 하는 말. 늘 열려있는 꽃 마음 하나 진지함 가운데 다정하고 희롱 가운데 맑다.”<한 해 내내 봄, 괴테 시 전집, 전영애 옮김, 민음사 刊>
여린 풀잎의 숨 쉬는 소리가 새근새근 들리는 듯하다. 창가에 스며드는 은은한 황혼의 햇살 에 고요히 앉아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겸허의 마음자리에 들어 온 자연은 ‘나’와 하나 되어 참된 사유세계를 동경한다. ‘가슴에서 우러난 감정을 담아 만든 작품’이라 고백한 차이코프스키 ‘현을 위한 세레나데(Serenade for Strings)’선율이 저 연록의 잎사귀를 살찌우는 햇발에 어울려 창 너머까지 채워진다.
화면배경의 움직임들은 전면의 자연과 어울린다. 나뭇잎, 풀잎의 구상적인 것은 실은 밖 풍경이다. 그것을 실내에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일 뿐.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데려옴으로써 자연이 곧 나, 내가 자연이 되는 공존의 명상적 미학이 펼쳐지는 것이다. 맑고 고운 화면의 추구에 대한 작가의지는 확고한 듯하다.
천위 바탕에 거친 돌가루를 칠하고 그 위에 잎사귀, 풀을 그리고 다시 덮고 그런 겹겹 위 세밀한 채색을 했다. 짙은 보라색으로 직선을 처리하여 실내를 표현하는 현대적 감각을 아울렀다. 이로써 결국은 본질에 가까운 단순화 된 농축된 방향의 지향인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복숭아밭이 많았는데 봄이면 온통 산이 분홍색이었다. 아직도 그게 눈에 선하다. 배롱나무, 개망초, 익으면 까맣게 되는 까마중 열매, 동네 뒷동산 숲에서 마주친 색채의 충격을 처음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었던, 초록잎사귀 속 빨간 산딸기의 그 보색…. 그림이라는 것이 기억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72.7×50㎝
◇녹색생명력의 치유
작가는 첫 개인전을 1993년 백송화랑에서 들풀과 야생화의 강한 생장에너지를 소재로 리얼한 작품을 선보였다. 1998년도 상문당갤러리에선 전통화조도 구도를 차용하여 수묵과 채색화기법을 혼용하여 발표했다. 2008년도엔 장은선갤러리 전시와 춘추미술상을 수상하여 백송화랑에서 기념전을 가졌다.
세밀한 묘사의 견(絹)작업을 하면서, 대상재현에 충실했던 이전과 달리 시선이 내면으로 이동해 원근이나 입체감을 최소화했다. 대신 그 속에 내재한 정신성에 무게를 두는 표현법에 몰두하게 된다. 이후 2014년 조선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견 특성을 살려 부드러운 채색표현을 하려고 노력했다. 배경에 멀리보이는 산과 나무를 먹으로 그리고 그 위에 채색으로 덮고 닦아내고를 반복하여 내가 느낀 깊고 맑은 자연의 한순간을 표현하려 했다.”
화가 이순애
이순애 작가는 경희대학교 및 동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화여성작가회장이다. 이번 열여덟 번째 ‘거닐다’개인전은 10월1일 오픈해 11월30일까지 서울시 관악구 낙성대동,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2개월간 총33점을 선보이며 전시 중이다.
전시공간에서 인터뷰 한 작가는 “풀과 녹색에 천착하는 것은 생명력 때문이다. 그것만 보고 있어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고 그림에 몰두하는 자체가 행복하다. 그것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다”라고 전했다. 화가의 길에 대한 소회를 물어보았다. “수입이라고 하는 것이 변변치 않으면서도 꿋꿋이 긴 세월을 기쁨과 고민, 좌절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혼자 하는 일에 빠지는 사람이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주간한국 2017년 11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