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음악 인문학

풍상 이긴 굽은 가지 어버이를 닮았다-from 사진작가 고원재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4. 5. 20. 23:53

 

큰 걸음도 섬세하게, 설악산 권금성의 무학송 2009

 

 

 

소나무 이미지도전과 안식’‘거대와 섬세의 조화

 

산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적막한 겨울 설악의 저녁. 곧 눈이 펑펑 쏟아질 듯, 휘익 한 줄기 바람을 타고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는 어느 산사의 목어(木魚)소리.

 

, 투두둑. 꽃이 솔방울이 된 생명의 역사. 두 개의 솔씨를, 대지가 품는다. 솔방울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노송(老松)이 보내야 하는 결단이었다.

 

이제 척박한 땅에서 강하게 살아남아야 소나무라는 이름을 얻는다. “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이 지표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건목(建木)”이 될 때까지. (황지우 시/소나무에 대한 예배 중)

 

거인의 발걸음처럼 힘차게 내딛는 줄기의 끝에 팔색조(八色鳥) 모양의 작은 가지가 사뿐히 자리하고 있다. 암벽에 뿌리를 박고 온갖 풍상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저 굵은 혈맥으로 거머쥔 뿌리의 힘. 설악산 권금성(權金城) 무학송(舞鶴松)은 산 하나를 통째로 움켜쥐고 있다.

 

 

 

 

안식처, 전북 고창 2008

 

 

영겁의 세월과 맞선 우직한 뿌리내림

 

800여 년 시간의 파괴력을 거뜬히 이겨냈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원리들에 끄떡없는 영겁(永劫) 세월을. 고봉준령 산허리 구름 걷어내 사시사철 호방(豪放)하게 푸름 펼치노라면 하늘을 향하는 거대한 날갯짓의 한 마리 학()으로도 모자람 없구나.

 

무엇이 이 솔씨 하나를 이토록 오랜 세월 지조의 기품으로 이끄는가. 조심조심 소나무 그늘 풀을 헤치며 아래 바위를 더듬으며 내려간다. 아이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칭얼대기도, 코도 훔치고 두려움을 만나면 치마를 꼭 잡고 어머니 뒤로 숨어버리듯이. 아아! 뿌리는 바위를 잡고 바위는 뿌리를 안아 천 년을 아름다운 공덕(功德)으로 꿋꿋이 서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흐르는 물소리. 그렇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저 물, 물이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며 얼마나 범용(凡庸)한 민초들의 정신들을 위대하게 이끌어 혼()으로 승화시켰던가.

 

들녘 평지에 서 있는 안식처는 부부송()이었다. 몇 해 전 한 그루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떠나는 자의 바람을 지키는 저 확고한 믿음. 어린 가지들이 행여 다칠세라 노송은 온몸으로 맞서 거센 바람에 버티고 서 있다.

 

어린것의 안락과 편안을 위한 뜨거운 노고. 마지막 안식처란 어버이 품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낙조(落照)에 외로이 홀로 서 있어 더욱 아름답다. 저녁나절 밭일을 마무리하고 허기진 귀가길 소나무 아래에 지게를 밭쳐놓고 담배 한 대로 하루를 갈무리 하던 의 아버지를 마중나간 어린 나는 저기 먼발치서 보았었지. 그때 노을은 왜 그리 눈부시게 살얼음이 낀 들녘에서 반짝이던지.

 

기른다고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닙니다. 노송나무와 삼나무 또한, 인간에게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자라지 않습니다.”(니시오카 츠네카츠/최성현 옮김,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중)

 

 

 

 

염원은 꽃으로 피어나고, 충남 홍성 2008

 

 

강인한 생명력, 지조와 기품으로 승화

 

온갖 잡티를 태우는 소나무 장작 뜨거운 불. 꼬박 하루 밤낮 철광석을 쇳물로 녹였던 철기문화 제련에 어찌 소나무가 없었으랴. 불과 철() 그리고 인간은 오묘한 질서에 의해 수련(修鍊)된다.

 

녹여내는 것은 불순물을 거른다는 것이다. 절제는 곧 더 큰 세상을 본다는 것.

작가는 나는 소나무에서 자신과 인간을 본다고 말했다. 그래서 굵직하고 거대한 형태들 사이로 부드럽게 흐르는 선의 율동은 작가의 휴머니즘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미지들은 힘차면서 따뜻하다. 휘어진 소나무가 지닌 율동성과 카메라의 기술적인 특성이 작가의 부드러운 심성과 합해져서 거대와 섬세, 도전과 안식 그리고 이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형성되고 있다.

 

”(유헌식 단국대 교수, 문예비평가) 그러하기에 자신이 소나무에 빨려 들어가기 보다는 소나무를 자기 쪽으로 빨아 잡는다. 바로 거기에 야성과 온정이 예()로써 장구한 세월의 연속성에 빛을 더하는 소나무가, 정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