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인사, 65×130㎝ 비단에 채색&프린팅배접, 2015
움트는 염원 정갈한 한국성
“당신은 옛 맹서를 깨치고 가십니다 당신의 맹서는 얼마나 참되얐습니까 그 맹서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참 맹서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옛 맹서로 돌어올 줄을 압니다 그것은 엄숙한 인과율(因果律)입니다/나는 당신과 떠날 때에 입맞춘 입설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돌어와서 다시 입맞추기를 기다립니다”<원본 한용운시집, 인과율(因果律), 김용직 주해, 깊은샘>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조선태종5년인 1405년에 지어진 이후 숱한 우리역사의 자국들을 품고 고요히 새해를 맞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앞이다. 물망초심 초심불망(勿忘初心 初心不忘)이라 했던가. 한 소녀가 큰절을 올리고 있다. 소한 매서운 추위 지나 새봄이 오면 저 높은 궁궐담 너머 만첩(萬疊) 홍매화 고혹자태로 만발할지니 태평성대 꽃향기 가득할까!
작품배경은 경복궁과 창덕궁 가운데 삼청동, 재동, 안국동, 사간동 등 한옥마을 북촌이다. 1908년 계동엔 전국각지 애국지사들이 교육일념으로 세운 민립사학 중앙중·고등학교가 세워진다. 그리고 근처엔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19년 2월28일 밤, 각처에 배포할 독립선언서 3천매를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전달했던 유심사(惟心社) 터가 있다.
1909년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다. 대한제국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었던 때,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며 개혁의지 강했던 양반출신한국인들만으로 교회가 세워지니 바로 안동교회(安洞敎會)다. 100년이 넘는 동안 근대현대사를 관통해 오면서 국가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온 교회 맞은편 한국정치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이 거주한 고택이 있다. 그리고 오늘 한 소녀가 예쁘장하니 북촌 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누군가를 알아본 듯 약간 기울인 아이의 친화적 몸짓이 무척 순진무구하다.
(좌)세움 아트를 지나다, 45.5×53㎝ (우)안동교회 앞을 거닐다, 45.5×53㎝
◇역사적 건물과 인물 그리고 정체성
화폭은 부드럽고 우아한 비단질감과 한복이라는 소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마치 그림이 비단 자체가 되어버린 듯 고아함이 배어나온다. 은은한 얼굴의 음영과 형상화는 쌀알만 한 작은 점(點)을 반복하여 쌓아올려 색을 입힌 지난한 노동의 흔적이다.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그림과 달리 배경은 사진으로 처리하는 독특한 방식을 드러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적인 이야기가 생성된다. 이를테면 ‘새해인사’의 창덕궁배경사진은 컴퓨터로 작업한 이미지를 접목했고, 화관 쓴 소녀의 주위정경인 소격동 세움아트스페이스 건물은 선이나 하얀 질감을 직접 그려 인물과 어울리게 하였다.
작가는 지난 2001년 인사갤러리에서 어린이를 모티브로 첫 개인전을 가졌다. 2006년 경향갤러리 전시서 동자승을 첫 선 보였는데 “동자승이미지가 한국화와 잘 어울렸고 인물자체에 호감과 매력을 가지게 되어 현재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라고 했다. 또 2007년부터 조선시대초상화에 대한 감흥이 일어 그 기법을 연구하게 된다.
“유교사회에서 여성초상화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시대여성의초상화를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인도’의 탄생배경”이라고 밝혔다. 이 시리즈는 2010년 갤러리 팔레 드 서울 전시에서 가히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최근 북촌시리즈를 통해 역사물과 현대의 아이들을 한 화면에 조형함으로써 장소성이 갖는 정체성의미를 그윽하게 함의해 내고 있다.
김정란 작가
김정란 작가는 상명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대학원(미술학박사)을 졸업했다.갤러리FM, 장은선 갤러리, 가나아트스페이스 등에서 개인전을 20회 가졌다. 겨울가랑비가 흩뿌리는 인사동에서 화가로서 어떤 소망을 꿈꾸는지 대화를 나눴다.
“보다 깊이 있는 작업이 병행되어야겠지만 무엇보다 꾸준한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이 작가 진국이다’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나의 그림을 보고 누구나 ‘좋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해 낼 것이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주간한국 2016년 12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