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철환
아직도 겨울.
껍질만으로 서 있는 나목들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긴 시간 침묵에 잠겨있다. 평정(平靜)의 표정일까. 가끔 휙휙 지나는 바람소리만이 정적을 깨우는 겨울 밤 시간에도 고요히 그렇게 있다. 이른 아침. 양평 작업실 인근 강변의 안개가 걷히고 모처럼의 햇살이 눈부시게 깨끗하다. 나는 창을 열어 젖혔다. 일순간 확 안겨오는 바람의 촉감, 부드러운 분명한 기운.
아, 봄이 온다.
문득 내 절친한 친구에 한 아름 추억을 안겨주었던 아련한 어느 봄날의 추억이 스쳐간다. 그렇게 봄은 친구를 부르는 계절인가. 나는 꽤 오랜 시간 창을 열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지금의 작품세계, 목련 연작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목련 꽃 그 이전의 존재의미를 담고자 했던 고뇌의 시간도 봄이었다.
고백하자면 그 때 이후 늘 서둘러 봄을 기다려 캔버스를 펼쳐놓고, 그리고 목련보다 먼저 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목련은 봄 밤 이슬로 수줍게 갈증을 적시곤 어느새 나를 허무에 빠뜨리곤 했었다.
숨죽여 기다린 보람도 없이 풀죽어 목련 아래에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는 나에게 그러나 그로부터 머지않은 날, 한 잎 떨어지는 나풀거림으로 생(生)의 찰나를 일깨워 주곤 했었다. 나는 그 때 언덕 기슭에 서 있던 목련 꽃이 밤이면 홀로이 떨어져 봄날의 여린 풀잎 위를 순백 청춘의 꽃잎을 스스로 수놓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곤 어느 해 늦봄. 푸르른 청춘의 달빛 아래 고요한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비친 순백의 꽃송이가 하늘거릴 때 비로써 나는 너를 안을 수 있었지. 그렇게 잔잔히 흐르는 부드러운 고뇌, 진솔한 고백록을 들었던 그로부터의 봄, 내 청춘의 목련 꽃 추억을 아직 잊지 못한다. 혹자는 너의 짧은 생의 이야기들을 즐겨하는 것으로 탐문했지만 나는 세월을 인내해 온 너의 숭고한 언어에 귀 기울였어.
내 화폭으로의 인도(引導)!
하여 나는, 목련 너의 본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형상의 부여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의 생명의 활기와 인간의 정신을 통찰하는 무엇이 절실했었던 것이지. 그리고 마침내 너의 매혹적 꽃잎과 도자기의 어울림을 통하여 진정한 생명의 비유, 그 자연스러운 만남을 펼쳐낼 수 있었던 거야.
그것은 하나의 길. 봄이 오면 너와 함께할 명상의 시간들을 상상하며 나는 벌써 설레고 있어. 새봄 새롭게 환하게 생의 길을 여는…. △글=박철환 작가
△2010년 2월5일 스포츠월드/SW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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