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BLACK HOLE, 182×228㎝ mixed media, 2015,ⓒADAGP
숲이 융합하는 광대한 우주의 속살
올 가을에 접어들면서 첫 선을 보인 ‘Forest-BLACK HOLE’ 작품을 작가의 아틀리에서 처음 보았을 때 잿빛느낌이 가장 먼저 전해졌다. 붉은 용암이 솟아 흘러내리며 휩쓴 대지에 비와 바람이 지나고 그렇게 지금으로부터 먼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태고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친 듯 깊은 풍경이었다. 한때 꽃과 열매를 풍성하게 선사했을 아름드리 고목의 숭숭 뚫린 구멍으로 안개가 흘러가다 머물고 다시 그 자리를 내주는 흐름이 심상으로 밀려왔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그의 저서 ‘불의 정신분석/초의 불꽃 외’에서 설파한 “촛불은 타는 액체이다. 이것은 불꽃의 분수라는 초현실주의적인 세계를 준비한다. 분수와 불꽃, 나무와 불꽃이 융합하는 가운데에 세계의 모든 비밀이 있다”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작품화면 위를 겹치며 지나갔다.
Forest-BLACK HOLE, 91×91㎝ mixed media, 2015 ⓒADAGP
그러고 다시 보니 재색은 불꽃인 나무 그 생체(生體)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영겁(永劫)의 적막을 품은 삼림과 계곡강줄기 군데군데 보이는 기암괴석들은 필연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광음의 위안으로 서 있다. 화면은 많은 이야기들을 녹여내고 생략한 후에 남겨진 뼈대처럼 광대한 우주의 신비를 품은 채 미묘한 조화미의 풍광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신작은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레핀아카데미에서 수학했던 작가가 열차 창밖에 끝없이 펼쳐진 환상적인 숲의 영감을 풀어낸 ‘자작나무’연작과 2011년 이후 발표해 온 반추상 ‘Cluster(군상)’시리즈에 이어 선보이는 작품이다. 닥나무와 한지재료 등 오브제와 오일페인팅을 캔버스위에 함께 운용한 기법은 저 웅혼한 대자연의 속살을 드러낸 듯하다.
화가 류영신
류영신 작가는 숲과 우주의 근원적 교감을 스펙터클한 첼로선율 같은 장중한 울림으로 자신의 회화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지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울러 비교적 작업속도감이 빠른 강점과 감각이 잘 융화되면서 향후 시선을 사로잡는 색채운용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티끌의 흔적에서부터 형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나’를 포용해 내고 있는 ‘Forest-BLACK HOLE’시리즈는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얘기이자 하나의 전체로서 광활한 우주에 대한 추상세계로 더욱 진화할 것이다.
△글 출처=주간한국, 2015년 11월23일자, 권병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