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신철
요즈음은 슬로우 걷기 등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잘 알려져 있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청산도가 필자의 고향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의 청산도는 그야말로 단지 외로운 섬일 뿐이었다.
필자는 청산도에서도 시골 마을인 외가댁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많이 보냈는데 그 마을 이름이 상서리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상서리 동네 풍경은 우물이 동네의 중심과 마을 어귀에 있었다.
나는 뛰어놀다가 목이 마르면 우물로 가서 바가지로 물을 떠먹었는데 그 맛이야말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청량음료였다. 깨끗하고도 상쾌한 물맛의 청량감을 나는 아직 그 어떤 음료에서도 맛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 4, 5학년은 꽤 성장한 때였는데 외가 동네에서 본 기계문명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유일했다. 경운기도 자전거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시절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었는데 그릴 수 있는 것은 바다 풍경과 비행기뿐 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 때 이것을 그리면서 막연하지만 또 다른 세상, 도회지를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상서리 동네는 돌담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냥 여러 형태의 다양한 돌들로 쌓은 돌담일 뿐이었는데 이 나지막한 돌담을 이웃하여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인정 넘치는 풍경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서리가 내게 준 커다란 축복은 평평한 돌다리였다. 야트막한 개울을 건널 때 크고 넓적한 돌이 있었는데 필자에게는 천혜의 캔버스였던 것이다. 순수의 개울물과 커다란 돌 캔버스 그리고 여름 한 낮의 쨍쨍한 햇살은 어린 나의 그림 작업의 최고 후원자였던 셈이다.
돌 위에 최고의 물감인 맑디맑은 물로 나는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햇살이 그림을 거둬 가면 나는 또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림을 돌 캔버스위에 그렸던 것이다. 나의 이 열정적인 그림 작업은 해가 질 무렵에야 끝나곤 했었는데 그 시절 돌 캔버스의 그림에서 필자는 가장 원초적인 색감과 평화를 익혔다고 생각한다.
‘낯익음에 조우하다’에도 어린 시절, 그렸다가 말라 사라지고 또 다시 그렸던 그림그리기의 반복, 그 평평한 돌 캔버스의 기억풀이가 작품세계 어딘가에 녹아있을 것이다.
△글=신철/미술가
▲출처=이코노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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