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구룡폭포), 33.3×77.2㎝, 2012
“껍데기가 아니라 산 가운데 들어가 그 자체를 그렸다”는 박기수 화백(63). 구불구불 함축된 색(色)의 떼. 좌르르 구슬 쏟아지듯 펼치면 꽃구경, 이별의 노래, 강강술래…. 산에 매혹된 한 사나이의 일생을 건 집성(集成)엔 분명 진리도 있을 터이다.
산 이야기, 90.9×72.7㎝, 2010
진달래 꽃피면 꽃잎도 따고 새가 둥지를 틀면 새알을 보러 살금살금 기어갔다. 손등을 타고 오르는 새까만 개미떼에 놀라 하필이면 건드린 벌집. 독 오른 벌떼를 피해 산 아래를 뒹굴듯 달린 처절한 도주는 그나마 군데군데 쌓아놓은 거름으로 쓸 풀 더미 덕택에 끝이 났다.
그리고 또 하루. 적막 속에도 졸졸 골짝을 흘러내리는 아득한 물의 시간. 진실은 담담히 디딤돌을 휘돌아 삐뚤게 자란 은사시나무 밑동과 새끼품은 사슴의 마른 목젖을 적셔주었다. 그렇게 세월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쉼 없고 비와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 사라지곤 했다. 뭇 생(生)의 절정에 시금석이 된다는, 아름다움!
솔방울 한 짐 지고 바쁜 걸음으로 내려오는 어미를 누이보다 먼저 본 아기는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들녘에 앉아 젖 먹이던 어머니의 홀쭉한 배를 평생 가슴에 꽁꽁 묻고 도회(都會)의 거리를 누볐다. 깔깔한 바람이 부는 저녁. 공허한 시학에 뒤척이며 무수히 오르내리던 꿈속 고향 뒷동산엔 어느새 뿌옇게 동이 텄다. “학 한 마리/거룩한지고 훨훨 날아가는 아침으로/우리 아기 젖 차오른 어머니조차/아기와 함께 날아가는 아침으로”<고은 詩, 학>
그리움 사무치는가. 참다래는 녹색으로 익어가며 일몰의 쓸쓸한 만가((輓歌)에 가냘픈 어깨만 들썩인다. 따뜻하고 차가운 색조에서 얻어지는 고요함, 낙하하는 선(線)의 슬픔사이를 날아오르는 노랑지빠귀 새소리가 명랑하다. 또다시 능선의 외진 길섶. 월색이 은은하다. 쌀쌀한 공기에 코스모스가 옷깃여미며 낙엽이 타오르듯 자줏빛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설악산, 162.2×130.3㎝ Oil on Canvas, 2006
◇오오, 장엄한 기백의 존재여
나부끼는 눈발에 꿈적 않던 그대. 태양을 등에 업고 흰 눈 위로 햇발이 찬란하게 깔리는 그때, 아침을 여는 장엄한 기백을 보았지. 나는 눈발 위를 내달리며 굳센 네 가슴을 껴안고 싶었어. 너처럼 전력투구로 꿋꿋이 달릴 것이라 소리 질렀지. 떡갈나무 열매가 익는 어느 날 새가 알을 품듯 보드라운 흙이 포근히 나를 감쌀 때까지.
또 그대와 내가 한 영혼으로 배어들 때까지. 오천년을 한결같은 몸가짐, 깬 의식으로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 위에 바위처럼 굳건히 살아온 산이여. 무엇이든 누구나 다 품어주는 드넓은 도량(度量). 이것이 바로 백두대간의 혼(魂)이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2년 9월20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