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1306, 119.7×119.7㎝, 2013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어느 한 날 우연히 만난 풍경이 있다. 굽이굽이 강물에 길을 터준 고봉준령의 험준한 산세가장자리에 천년노송이 인고의 연륜처럼 굴곡진 허리춤을 턱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아래는 거짓말처럼 분지가 펼쳐져 아늑했다.
▲ History-1112, 100×80.3㎝ Mixed media, 2011
분명 무슨 터였을 것인데 듬성듬성 비석들이 호위병처럼 서 있었다. 풍상과 설한 속에서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혼(魂)의 비문을 껴안고 소나무와 서로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 History-1501, 52.5×52.5㎝, 2015
그곳엔 황혼이 깃들면 자그마한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잡풀에 묻혀 잠자듯 고요하던 하얀 연꽃들은 붉은 노을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그 속살과 조우하듯 하여 점점 홍련(紅蓮)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자상하게 옛 영화를 전하듯 주변파편들에 새겨진 연꽃봉오리들은 마치 부유스름한 물빛연못의 꽃들과 아름다운 재회를 하는 것만 같았다.
▲ History-1112, 100×80.3㎝ Mixed media, 2011
그때 자정(自淨)의 엄숙한 시간을 맞이하는 의식처럼 한 줄기 저녁바람이 멍한 정신을 환기시켜주었다. 그리고 해거름 대자연의 장엄한 교향곡 선율이 어둠에 사라질 때까지 슬프도록 윤기 흐르는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어느 애절한 로맨스를 경청한 새들도 차마 저녁 숲으로 서둘러 날아들지 못했다.
△출처=이코노믹리뷰 2015년 5월11일, 글-권동철(원문출처=경제월간 인사이트 코리아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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