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설여정(晩雪旅程), 143×363㎝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정애(情愛)의 불꽃시절 있었네. 눈송이를 조심스레 볼에 대며 미소 짓던 사람. 차갑고 따스하다는 말을 가슴으로 써내려갈 때, 그는 떠났네. 이별은 겨울바람처럼 날카롭고 황량한 거리만 등이 굽은 고목처럼 공허한데, 눈(雪)이 내리네. 랜던 로날드(Landon Ronald)연가곡 ‘삶의 윤회(輪回) A Cycle of Life’ 피아노 운율처럼 부드럽고 평화롭게 눈이 쌓이네. 눈 속에도 파릇한 희망의 싹은 돋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본다는 것을 알게 된 세월입니다.
정자무위(亭子無爲), 35×68㎝ 한지에 수묵담채, 2002
意境의 山水, 여백과 번짐
허(虛)와 무(無)의 세계와 눈(雪)의 절묘한 해후(邂逅)는 하얀 눈 밑에서의 전혀 새로운 느낌과 이야기들을 꿈꾸게 한다. 그림을 보는 이들의 서로 다른 생각에 따라 무한하고 다양한 모습들로 살아 움직여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한국화에서의 여백정신(餘白精神)은 우리정서가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된 여유와 여지의 공간”이라며 “생각의 숨을 쉴 수 있는 기쁨을 담으려 화폭의 화선지를 하얗게 남겨두려 한다. 갈등을 녹이는 화해, 질서의 근원이 여백 속에 녹아들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겨울기억, 69.5×115㎝(부분) 한지에 수묵담채, 2013
이와 함께 물의 번짐을 활용하여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이라는 포용의 세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번짐은 기억과 그리움 등 감수성을 불러 일으켜 단숨에 풍성하고 나직한 속삭임의 공간으로 설경의 진가를 격상시켜 놓고 있다. 여기에 바람과 눈, 꽃과 나비와 얼음 밑 계곡물소리 등 강약의 리듬감과 긴장감 그리고 생동감 등의 요소들이 스며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김충식 설경’이라고 회자되는 빼어난 서정성의 작품세계다.
방도리 겨울, 70×44㎝
작가는 평소 “전통 모필 붓과 화선지 그리고 먹은 무한한 방법과 가능성을 내포한 도구와 종이”라는 말을 자주 강조해 오고 있다. 이는 “수묵과 담채로 표현하는 수묵한국화의 화면은 곧 우주”라는 그의 지론과 맥을 같이한다. 동시에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영향을 받은 그가 오랫동안 탐색해 온 설경산수(雪景山水)에서 찾고자 한 조형언어, 즉 의경(意境)과 다름 아니다. 화백이 즐겨 암송하는 도덕경(道德經) 한 구절이 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풀이하면, 도(道)를 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미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칭 할 수 있다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無名)이 천지의 시작이며, 이름이 있는 것(有名)이 만물의 어머니이다.” 겨울눈이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눈 밭 속에 꽃이 피고 나비가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것이리라.
포구의 노래, 162×130㎝×4, 2004
섭리, 겨울 오면 다시 봄
흩날리는 희뿌연 허공너머 하나 둘 백열등이 세월의 노랫가락처럼 켜지는 저녁. 만선(滿船)의 노래를 부르며 귀항하는 청춘의 노래 힘차다. 나룻배에 걸터앉아 하얗게 눈을 맞으며 퇴역한 백발의 늙은 어부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나 부서진 송판 조각으로 장단을 두드리며 타령조가락으로 흥얼거린다. ‘바다의 수평선은 안정을 준다네. 조급하면 평화로움 놓치는구나. 선(線)너머 해 뜨고 해가 지니 오묘하여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결국은 하나일세. 그것이 우주의 섭리. 인생은 되풀이….’
△글=권동철 △출처=<경제월간지 인사이트코리아(Insight Korea)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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