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으로, 130.0×130.0㎝ Oil on Canvas, 2013 ⓒADAGP
은빛의 숲에 번지는 치유의 공명
“우편열차의 차장이 혼자 타락한 천사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바이올린은 여전히 옛 추억을 더듬어 나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창문을 통해 처녀처럼 새하얀 지붕이 멀리 바라보이고,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느새 어둠이 깃들었다.”<비가(悲歌), 이오시프 브로드스끼(Ioshif Brodsky)詩 겨울결혼식, 김학수 옮김, 정음사刊>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자작나무 숲엔 무슨 까닭인지 새들이 거의 수직으로 내려와 순식간에 무언가를 물고 다시 치솟았다. 공간감(空間感)의 영감을 선사하는 놀라운 비행(飛行)의 그 모든 것은 실로 순식간에 이뤄졌다.
고개를 들어 새들의 행방을 두리번거렸다. 아 자작나무의 상처를 애무하듯 하얀 나무껍질위에 어떤 흔들림도 없이 처연한 자태로 내려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새의 중량과 가지의 버팀이 이뤄낸 저 절대성의 밸런스는 어디서 연원하는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아이가 초록색칠놀이를 하듯 싹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가지위로 부슬부슬 가는 빗줄기가 춤추듯 뿌려졌다. 새들은 일제히 강가로 날아갔다. 그러자 나무를 타고 촉촉이 흘러내리는 방울들 사이 햇살은 투명리본처럼 순진하게 드러나 반짝였다.
116×116㎝ ⓒADAGP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연주, ‘차이콥스키-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Op.35’가 만개한 꽃향기에 비치는 연민의 눈동자처럼 미묘한 감정의 소리빛깔들을 수놓았다. 나무는 스스로 숲을 이루는 작은 피조물이라 겸손해 했지만 노랗고 연분홍빛깔의 황혼이 안개와 섞이며 하얀 나무껍질을 휘감는 경이로운 순수풍경 속으로 다채로운 광채들이 얹히고 있었다.
넋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새들의 고매한 기도의 흔적일까. 높은 그루터기엔 아늑한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나뭇잎사이 바람이 물안개처럼 부드럽게 번지고 뜨거운 열정을 품은 대지의 냄새가 숲길을 덮었다. 그때 숲속에 난 좁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생의 너울을 넘어 찾아드는 지친 조각배 하나가 언뜻 보였다.
91.0×91.0㎝ ⓒADAGP
◇영원성의 찰나, 존재여!
동굴(洞窟)엔 어둠속으로 스며드는 빛줄기를 따라 길게 암각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희미한 회백색 흔적만이 남아있는 무수한 숲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 안 조그마한 웅덩이엔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몇 물방울 소리가 벽면과 공명하며 동굴의 존재를 알렸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맑고 투명한 그 울림들은 지상의 안개와 해후하며 숲으로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새들이 노래를 멈추고 들꽃향기가 풀숲으로 흐르면 그 물방울소리는 청명한 화음으로 자작나무 사이를 노닐었다.
숲속으로, 91.0×91.0㎝,Oil on Canvas, 2012 ⓒADAGP
나무가 부드럽게 애무하는 그윽한 음성인가. 숲 속에 난 졸졸졸 흐르는 생명의 물줄기위로 그 동굴의 울림들이 사뿐히 내려앉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하얀 바탕의 캔버스에 지나간 붓질처럼 살랑바람이 흘러가던 시간, 안개 자욱한 가지에 초연히 앉아 있는 한 마리 새를 발견했다.
아 단지 새가 아님을, 영원성의 찰나를 본 것만 같아 그곳을 쉬이 떠나지 못하고 두 손을 감싸고만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류영신 작가(RYU YOUNG SHIN,柳栐慎,ARTIST RYU YOUNG SHIN)는 이렇게 메모했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는 묵언의 길을 나선다. 한발씩 걸어들어 가다보면 햇살에 눈부신 은빛나무를 만나고 청아한 숲의 물결이 멍든 마음을 포옹한다. 그곳에서 평안한 눈빛의 내 영혼을 바라본다. 나의 작품에서 그런 힐링이 함께하기를….”
△글=권동철, 2020년 인사이트코리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