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의 댄스
소나무를 찍는 작가는 많다. 동양에서 소나무는 전통적으로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선비의 절개와 기품을 뜻한다. 그래서 동양의 인문정신이나 예술적 감성에 탐닉하는 작가들은 소나무를 종종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의 조화 혹은 자연속의 인간을 지향하는 동양의 사상적 전통에서 소나무를 전제로 하는 사진 작품들의 경우 소나무는 대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마치 동양화 속의 노송과 나그네처럼 소나무는 인간이 귀의(歸依)해야 할 고향이라는 자연주의적 이미지로 부각되어 왔다.
하지만 고원재의 사진은 전통적인 의미의 자연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에게 소나무는 인간이 다가가야 할 귀착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나무를 인간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당긴다. 그래서 소나무를 철저하게 인간화시킨다. 단적으로 말하면 고원재의 소나무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신이 소나무에게 빨려 들어가기 보다는 소나무를 자기 쪽으로 빨아 잡는다. 이러한 작가적 특성은 그가 사용하는 360도 회전 가능한 사진기의 특성과 맞물리면서 독특한 영상 이미지를 낳는다. 라운드 샷을 통해 포착된 이미지는 왜곡되어 구심력이 강조되면서 자연으로 향하는 일체감이 아니라 인간(나)으로 향하는 일체감이 조성 된다.
비상하려는 자의 조건
결국 고원재에게 소나무는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중심적인 물아일체(物我一體)적인 태도가 작품 안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태도는 ‘아(我)를 버리고 물(物)을 체득하라’는 중국 미학의 요구에 저항하는 셈이다. 소나무에서 그는 자신과 인간을 본다. 그래서 그의 소나무 형상은 인간적인 의미를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다. 그의 소나무는 인간적이다. 그의 작품 전반을 인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걸어가는 소나무’, ‘춤추는 소나무’, ‘웃는 소나무’ 등을 만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원재의 작품 앞에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힘’, 곧 ‘생명력‘이다. 음(陰)과 양(陽)을 대비해서 볼 때 그의 작품은 양의 요소가 지배적이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 곳곳에는 분명(顯)하고 장대(壯)하며 우아(雅)한 양(陽)의 기운이 흐른다. 원근의 차이가 뚜렷하고 주제를 구성하는 피사체들의 형태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면서도 유연한 조형미가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흑백의 섬세한 명암적 계조에 힘입어 근거리 피사체들의 디테일이 살아 꿈틀거려 소나무의 표피가 지닌 구조와 율동이 최대한 부각되고 있다.
소나무의 웃음
작품의 외면에서 풍겨나는 직선적인 힘과 생명력에 호응하여 작품내면에서 스며나는 곡선적인 유연성을 간과 할 수 없다. 작가가 소나무를 인간화/의인화했다고 할 때, 여기에서 따스한 인간미를 읽어내는 일이 긴요하다. 그의 작품에는 야성(野性)과 온정(溫情)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굵직하고 거대한 형태들 사이로 부드럽게 흐르는 선의 율동은 작가의 휴머니즘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미지들은 힘차면서 따뜻하다. 휘어진 소나무가 지닌 율동성과 카메라의 기술적인 특성이 작가의 부드러운 심성과 합해져서 거대와 섬세, 도전과 안식 그리고 이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형상화되고 있다.
▲글: 유헌식/단국대 교수, 문예비평가
사진작가 고원재
ROTATE THE WORLD/인사아트센타, 소나무는 휴머니즘이다/토포하우스, 중국 연변대 초대전) 등을 가졌으며 한, 중 교류전(중국 길림성)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품집으로 ‘ROTATE THE WORLD’, ‘소나무는 휴머니즘이다’을 발간했다. 작품 소장처는 동국제강, 기전산업, 중국 연변대학 등이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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