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날의 포근함이 마음까지 여유롭게 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성당 인근 작가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원목의 기다란 평면 테이블 작업대가 눈에 들어왔다. 불화작업의 특성상 불빛이 필요한 것을 감안해 두껍고 기다란 통유리로 덮은 하단엔 형광등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고 보니 캔버스 오일페인팅 작업대, 판화작업에 필요한 조각도와 여러 공구들, 드로잉 작업들을 보관하는 열린 수납장들 등이 원목으로 앤티크(antique)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키 높은 책장엔 국내·외 불교서적을 비롯한 인문학적 도서들도 상당히 많았다.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왔지만 같은 건물에서 18년째 작업해 온 화실엔 손때 묻은 물건들이 정갈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작가가 손수 목판화한 편액(扁額) 하나가 캔버스작업대위에 걸려 있었다. ‘정와(靜窩)’였다. “조선후기 양명학자이며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가 쓴 ‘조용하고 고요한 움막’이라는 이 뜻을 가까이 두고 음미(吟味)하며 소박하지만 충실한 마음의 작업 자세를 유지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누드(nude) 작업 ‘불화속의 그녀’도 작은 오두막집에 기거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진자줏빛 소파의 뜨거운 열망이 감싼 그녀의 우유 빛 어깨선 살결에 드리운 햇살. 창밖 어딘가로 훨훨 날아가고픈 것일까. 우아한 자태와 차분한 내면을 두드리는 소리. 혹여 여명의 설원(雪原)을 질주하는 말발굽, 담벼락 아래 홀로 피어나는 아직은 키 낮은 명자꽃노래.
부풀은 풍선이 팔랑팔랑 춤을 추며 날아오른다. 달콤한 별 사탕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을 때 순정한 마음엔 연가(戀歌)가 흘렀다. 작가는 “시골에서 대학입학시험을 치러 단발머리 소녀가 열차에 올랐었다. 전송 나온 친구가 건네준 별 사탕 한 봉지. 두 손에 꼭 쥐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리던 두려움과 설렘이 마치 어제일 같기만 하다. 발랄한 젊은 여인들이 웃고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걸 보다 문득 옛 친구가 그리워 붓을 들었다”라고 했다.
불화속의 그녀, 90x72.7cm, 장지에 채색
넝쿨 꽃이 흔들리고 이슬 머금은 향기가 진동한다. 꿈틀거림과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이 건네는 향내인가. 벗은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나’, 부처의 세계를 보고 있는 ‘그녀’. 여인의 누드를 사이에 두고 서로 판이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간극(間隙). 그렇다면 그 틈을 매우는 것도 필경 살아있는 것일 터. 아아, 비로써 생성과 소멸의 다리를 잇는 저 가느스름 나부끼는 꽃잎이여!
[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문화전문기자, 2014년 4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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