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노을, 45.5×183㎝ 지본수묵, 2016
용틀임, 저 장중한 곡선의 자연미
“한 세월 멀리 걷돌다 돌아와 보니 너는 떠날 때 손 흔들던 그 바람이었구나. (중략) 바람은 흐느끼는 부활인가, 추억인가. 떠돌며 힘들게 살아 온 탓인지 아침이 되어서야 이슬에 젖는 바람의 잎. 무모한 생애의 고장난 신호등이 나이도 잊은 채 목 쉰 노래를 부른다. 두고 온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바람이 늘 흐느낀다는 마을, 이 길목에 와서야 겨우 알겠다.” <마종기 詩, 길목에 서 있는 바람, 문학과 지성사>
소나무줄기는 물고기비늘처럼 유연하게 바람을 끌어안는다. 소슬바람이 쓸쓸한 나그네의 헤진 가슴을 무례하게 파고드는 해거름. 측필(側筆)로 그려낸 솔바람 사이 풍상을 녹여낸 처연한 노랫가락이 흩날리누나. 부러진 가지에 새순흔적 역력하다. 고독은 필시 상처가 아문 자리라고 누가 얘기했던가.
장중한 세월의 너울을 닮은 거무스름한 등걸의 흔적 그 휘어진 굵은 가지 하나가 대지를 향해 쓰러져 있다. 애처로움을 보듬듯 검은 화산토를 뿌리 쪽에 덮어주며 안정감을 주는 자연미 그리고 노을과 하늘과 구름을 담묵(淡墨)으로 처리하여 소나무와 어우러지게 펼쳐낸 고감각의 배려가 인상적이다.
또 한 획을 150~200㎝까지 줄기서부터 뿌리까지 단번에 그려낼 수 있는 웅장한 몰입의 기운이 아니면 어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화백은 “제주시 애월읍이 고향인데 서쪽 비양도(飛揚島)가 보이는 마을에서 자랐다. 바다와 석양이 아름다운 동네엔 어마어마하게 큰 팽나무가 있었는데 황혼이 물들 즈음 까마귀가 그 나무로 날아와 앉으면 강렬한 대비의 풍경을 연출했다. 그러한 감명 깊은 유년의 기억들이 반영되지 않았나싶다”라고 했다.
노송-석양, 97×179㎝, 2013
◇화업, 배움의 구도자
80년대 초, 대학초년생이었던 그는 시대상황영향으로 여름방학 시작 전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바닷가로 나가 스케치를 하려는데 해풍이 후비고 때려 화선지가 찢어져 다시 켄트지로 그리게 되는데 그때 가슴으로 와 닿은 것이 비바람이었다고 한다. 그 바람을 품은 바다의 고요는 여성적이지만 강한 남성성의 격렬함도 지니고 있다는 미학적 체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홀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발과 몸으로 부딪히고 느끼며 우미(優美)한 섬을 터득했다. 그리고 겨울방학 때 다시 제주로 돌아와 때마침 도심에서 이전하는 여학교 앞 문방구 주인이 폐업정리하면서 건네준 크레파스를 가지고 추운 날씨 붓 대신에 보리밭, 새카만 현무암돌담, 동백 등 강한 원색을 유화처럼 그렸다.
“그러고 나니 섬을 온몸으로 껴안았다는 확신이 섰는데 지금 뒤돌아보면 그때 작가생활의 기본기를 터득한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이후 1987년 동아미술제에 당시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앞 작은 교회에 있는 세 그루 소나무를 가로120㎝, 높이240㎝의 대형크기를 일필로 그려 출품, 동아미술상문인화부문수상을 거머쥐게 된다.
문봉선 화백
한편 문봉선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중국남경예술대학원 박사 졸업했다. 현재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5년 관훈미술관 첫 개인전부터 올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백두대간와유’와 이번 10월28~11월12일까지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열리는 ‘제7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작가상’수상기념 및 ‘겸재정선미술관선정 오늘의 작가’초대전에 이르기까지 스물여섯 번째 개인전을 가지는 동안 항상 탐구와 변화를 모색해 왔다.
고전에 바탕을 두면서 소재를 연구, 집중적으로 그리고 다시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치열한 집념의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화백은 “나만의 소나무를 그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러 문헌과 자료 등을 찾아 무던히도 많이 기웃거렸는데 충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결단을 내렸는데 결국 저 들판에 부는 바람과 소나무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그렇게 한 십년 소나무와 독대했다. 그랬더니 좀 보이고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도 수도승처럼 배움의 구도자로 정진하려한다”라고 밝혔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주간한국 2016년 10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