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화가의 아틀리에

〔GYU JOON YANG〕 서양화가 양규준, 아틀리에①|합일추구(르포,中庸,중용,양규준,화가 양규준,양규준 화백,양규준 작가,혼성,Hybrid)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15. 7. 8. 20:30

 

서양화가 양규준(Artist, Gyu-Joon Yang)

 

 

 

플라타너스 커다란 잎들이 허공에서 회전하다 가로수 거리에 내려앉았다. 마치 한적한 어느 읍내의 곧게 뻗은 길 느낌 같았다. 그러한 곳, 서울시 송파구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 했다. 역동성이 강하게 전해오는 미완의 원()이 그려진 작품들이 나란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지난 15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한국과 다른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는 귀국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작업실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는 만남의 모두(冒頭)어느 날 뉴질랜드에서 문득 내 자신이 혼성(混成)의 정체성을 가졌음을 느끼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 말에는 개체로서의 왜소한 자아, 현실과 향수에 대한 암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의 깊이와 찰나 등 이중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 의식의 융화(融和)”가 캔버스에 녹아 스며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보였다.

 

 

 

 

 

    Fluid mind, 130×260, acrylic on canvas, 2010 (Diptych)

 

 

 

생성과 소멸 그 평형가치

혼성(Hybrid)의 드러냄. 그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소란과 정적, 이성과 감성, 생성과 소멸, 음과 양, 동양과 서양 등 상호적 요소의 대립을 지양(止揚)하고 평형의 가치를 통한 합일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그 조건은 홀로가 아닌 혼성이라는 여건이어야 가능하다. 또 하나는 변화하되 합일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서로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평화적이라는 평형가치가 녹아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명제 ‘Fluid mind’의 존재에서 비롯된 내일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삶의 자취와 우주생성과 소멸이라는 혼성을 화두(話頭)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융·복합시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질문을 내어놓고 있는 것과 또한 다르지 않다.

 

 

 

 

   

    Moderation, 76cm, 2012 (Diameter)

 

 

 

中庸, 두 폭의 조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태평양 아침 해안의 곧게 뻗은 야자나무 사이 하늘, 허공을 한가로이 떠도는 황혼 무렵 구름들은 빈 공간이 아니라 부단히 음과 양의 기()를 부딪치며 기운을 전개 한다.”

 

이어 내 작업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삼라만상을 있게 하는 어떤 징후를 헤아리는 일로부터 시작 된다고 했다. 징후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연의 생명력과 삶을 내포하는 어떤 핵심을 읽어가고 또 풀이하려 할 것이다. ‘중용(Moderation)-안녕하세요?’라고 명명한 작품은 이러한 고뇌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Winter, spring, summer, autumn, 102×72, 2010 (Each)

 

 

 

작가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대략 한 시간쯤 앉아 명상에 잠긴다라고 전했다. 중용과 정신을 동일선상에 둔 그의 인식은 마치 번짐과 여백조화를 떠올리게 한다.

 

부연하자면, 명상 후 산뜻한 정신은 공간을 확 트이게 열어놓는다. 작가가 바라보았던 해안의 야자나무와 조국의 산하와의 재회에서 다시 확인한 하이브리드. 시간을 뛰어넘은 두 폭의 조화로움은 그렇게 중용의 정신으로 우러나고 있는 것이다.

 

 

 

 

출처=-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31120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