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모정(母情), 116.7×91cm Oil on Canvas, 2010
순도 높은 빛과 색채. 전통을 기조로 한 강렬한 현대성. 모정(母情)의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가 빚어내는 화면은 그 자체가 환상적 드라마다. 바로 우리네 어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억납니다. 네 살, 다섯 살 즈음 경기(驚起)를 하며 발버둥치는 나를 담요에 감싸고 캄캄한 밤길을 종종걸음으로 의원을 찾던 어머니의 가쁜 호흡을. 가만 생각해보면, 신발이나 제대로 신고 달렸겠습니까! 돌아오는 길 밤하늘 별들이 손에 잡힐 듯 청아하게 빛났던 것도 안도했던 어머니 가슴으로 꼭 껴안은 자정(慈情) 덕분이었다는 것을.
오일장(五日場)은 늘 설렘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요. 장터는 넓은 평지였는데 외곽 비탈진 언덕으론 조그마한 집들이 계단처럼 모여 있는 동네가 있었지요. 장날이면 그 마을 입구엔 닭을 파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곳은 ‘꼬끼오∼’하는 붉은 벼슬 장닭 울음소리까지 더해 종일 시끌벅쩍 했습니다. 마을 입구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늘 아래엔 널찍한 쉼터가 있었는데 장날이면 어머니들이 둥그렇게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곳이기도 했지요. 그곳은 언덕배기 흙집들과 어우러진 시장에서 가장 아늑하고도 평화스러운 곳으로 내 유년의 비망록(備忘錄)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물론 내 곁엔 언제나 가장 완전한 거인, 어머니가 든든히 계셨던 것이지요. “한겨울 북극점부터 남극점까지 금세 보따리장사를 다녀와/불쑥 들어서며 야단을 치시던 엄마/구부려도 구부려지지 않던 엄마”<배용제 詩, 엄마, 이름이 엄마인 엄마>
헤아려보면 아버지 연세가 지천명을 넘겼을 즈음이지 싶습니다. 어머니께서 홀로 너른 마당을 내려다보며 부르시던 비원(悲願)섞인 흥얼거림을 들었었지요. 평소 마시지 못하는 술 한 모금을 하셨나 봅니다. 내조와 자식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던진 여인으로서 울컥 솟아나는 비애감이 묻어 있었지요.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요? 어머니의 그 노랫가락은 한 동안 내 귓가에 머물렀고 내용도 모르는 그 곡조는 그 후 내 마음 깊이 새겨져 좌절의 힘겨움에 빠져들 때마다 분발의 노래로, 격려의 메시지로 부활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제가 중년이 되어 고향 오일장을 다시 찾았습니다. 국화꽃 문양(文樣)의 동그스름한 풀빵이 연탄 화덕에서 노르스름하니 잘 익어 양푼이 속 하얀 설탕에 뒹굽니다. 어릴 적 그 풍경은 내가 처음 발견한 가장 완전한 조형(造形) 세계였지요. 그런데 오늘 그것을 다시 보게 된 기쁨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따끈하게 입 안에서 구르는 맛이 여전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젠 그리움의 존재인 어머니께서 저기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군요. 나는, 풀빵을 쉬이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처=글-권동철, 이코노믹리뷰 2011년 9월1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