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도적 기억’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미술사가인 에른스트 크리스는 “모든 강력한 이미지는 화가가 살면서 겪는 경험과 갈등에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본래 모호하다”고 했다. 사람의 몸 안에는 텍스트와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매일 무엇인가를 보고, 읽고, 듣는 것 중에서 자신의 욕망, 혹은 트라우마에 연결된 것들이 뇌와 몸의 신경조직에 흩어져 켜켜이 쌓여 웅크리고 있다가 무엇인가에 의해 촉발되면 비로소 꿈틀거리게 된다.
조향숙이 2012년에 제출한 그녀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는 ‘비의도적 기억’과 동시간성을 통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011) 연작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분석하고 그 표현의 특성을 밝혔다.
“베르그손의 시간은 순차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인 시간, 즉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 시간이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비의도적 기억’은 과거의 한 때와 연관된 무언가와 우연히 마주침으로써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는 비의도적 기억이 현재에 소환되어 현재와 동시간성을 갖고 작용할 때, 비의도적 기억이, 화면이 분할되고 이미지의 조합, 병치, 중첩되는 것 등을 통해 표현했다. 말하자면 이는 과거와 현재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시간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비단 프루스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서도 “초봄은 항상 느릅나무향기와 슈베르트의 멜로디를 상기시켜 주었다. 멜로디와 함께 언제나 씁쓸한 느릅나무 냄새를 떠올리고 이 두 가지 연상이 합쳐져 봄이 되듯이...”처럼 우연히 촉발된 어떤 연상 작용은 작가 몸의 깊은 곳에 있던 이미지들을 일깨워 새롭게 편집하고 체계화시켜 그 촉발에 응답한다. 기억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한 인간의 정체성이란 어떤 기억을 지우고 어떤 기억을 저장할 것인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선별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향숙은 이러한 기억을 시각화함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 한, 경험과 사고방식이 같을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가끔 일어나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열한 스트레스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인간 안에 깊숙이 웅크린 채로 존재한다.
이 외상은 예술에서 확연히 적용되어 흔적으로 남게 되는데, 이 외상은 결국 잔재물, 부산물, 잉여물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판화는 시간의 흔적과 과정이 매우 중시되는 매체이다. 외상적 사유를 통해 주체는 존재 이유가 되며, 이 존재의 흔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이 시대에 판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외상이 예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스트레스나 외상을 해소할 때 비로소 행복이라는 감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도판04.)
행복은 불행과 한 쌍이며, 행복한 이미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깎여나간 나무 조각만큼의 불행했던 기억일 것이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이 합쳐서 유동하는 포용의 이미지가 된다.(도판05.1, 05.2.)
자신 안에 있던 언어화 되지 못했던 것을 이미지로 성찰해서 자신의 깊은 곳의 결핍과 상처와 대면해 이것들을 이해하고 해소할 때만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강물은 타자를 포용하며 넓은 대양으로 흐르듯이, 행복은 자신의 불행까지 포용한다는 말이며 이러한 포용은 타자에게까지 확대된다. (도판06)
비움을 통해서 행복이라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창조로서의 에로스라고나 할까? (도판07.1, 07.2.)
▲글·도판제공=임영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교수, 2020.12.
Writing and fig=Yim Young Kil, professor of printmaking College of Fine Arts Hongik University, 2020.12.
▲[한글평론 원제목]우리 전통의 정신과 형식에서 지속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행복한 기억들”연작–조향숙의 목판화에 대한 단상(斷想)들-
[English criticism title]The Series “To Find Lost Time-Happy memories”, Continued in the Spirit and the Form of Korean Tradition–Thoughts on the woodcut of Jo Hyang Sook-
▲자료출처= Jo Hyang Sook, To Find Lost Time-Happy memories(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행복한 기억), 2020. 12.2~7. 선 아트센터(SUN ART CENTER)개인전 도록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