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1909-2000)은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출생했다. 공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전학, 졸업하였다. 중국 만주에 있는 봉천문회고급중학(奉天文會高級中學)에 1928년 20세에 졸업하고 이후 상해에 있는 중국공학대학(中國工學大學)경제과에 입학, 1932년 24세에 졸업을 한다.
원곡은 일제시기~현대를 거치는 90여 평생을 저명한 인사들과 교유관계를 맺어왔다. 사승관계로 소전 손재형, 안창호를 비롯해 서예가로 김돈희, 최중길, 정현복, 고봉주 등 또 예술계는 김영기, 변관식, 박래현, 김기창, 이응노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과 교유했다.
1956년 ‘대성서예원’을 창설, 후진을 양성했고 국전심사 및 운영위원 역임하고 서예가연합회 회장과 미술협회고문 등을 지내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원곡서예상 제도를 1978년에 창설하였고 서거한 해 원곡문화재단을 설립했다. 2000년 9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는 “원곡은 5세부터 24세까지 신-구학문을 19년 동안 익힌, 당시로는 대단한 학력의 엘리트였다. 이렇게 외국유학을 하는 등 고학력의 수학경력이 서예가로 대성하는데 깊고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라고 논평했다.
◇한글-한자 혼용의 서체미
원곡은 고향에서 형인 기문(基文)과 지방의 명필 산정 신익선(山庭 辛翊善)으로부터 사사를 했고 1936년부터 1957년 49세까지는 소전 손재형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서예 학습을 본격적으로 했다. 이후 1970년대 초부터는 ‘원곡체’를 정착시켰다.
“독창적인 ‘원곡체’ 완성은 그가 지닌 예술적 기질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의 학문 세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곡은 최초로 ‘한국서예사’를 집필했으며, 서예가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로 거듭나기 위해 묵영(墨映), 책의 제자(題字), 컴퓨터 서체(폰트) 등 새로운 모색에 앞장섰다.
90년대 간판 글씨와 유명한 성경책 글씨 등이 모두 원곡체에 기반 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서체를 대중들이 좋아했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Curator Bae Wonjung,裵原正,미술사학 박사)>
원곡체는 한글과 한자 서예체의 구분 없이 기본획형 표현을 동일하게 하여 한글-한자 혼용작품의 서체미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원곡체는 문자 세로획의 경우에 대담하게 낙필하고 이어 끊어질듯하게 운필하고 다시 굵어지게 하는 운필로 특이한 획형을 기운 생동하게 나타낸다. 가로획은 아주 가늘게 물결치는 듯 표현하여 문자 전체를 행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닌 절충된 해행체(楷行體)를 종합적으로 구현하되 필력이 넘치고 물결치는 것 같은 유연성을 나타낸다.
“그의 서체가 책표지, 비문, 현판, 간판 등에 가장 많이 쓰인 기록을 남겨 생활-실용 서예분야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서예가로 평가된다. 이러한 글씨의 생활화는 그의 문집에서 나타낸 ‘서예의 생활화다’라는 말을 생전에 실천한 증거라고 평가할 수 있다.”<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특유의 서풍을 창안하고 응용하다’ 中>
한편 원곡 김기승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권동철, 데일리한국 2020년 6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