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발자취(年代記)

한국단색화 최명영, 단색화가 최명영, 단색화 최명영

권동철 Kwon Dong Chul 權銅哲 クォン·ドンチョル 2020. 1. 24. 16:15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최명영 화백<사진:권동철>



[최명영]1975~2015,한국단색화 최명영빛의 펼침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회화 작품이지만 눈에 감지된 것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공간]내지 [펼침]이었다. 그때 갑자기 []을 느꼈다. []이 보였다라는 것 보다는 []과 같은 분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시선이 아래의 검은 층과 위의 흰색 층의 위상차에 포착되었던 바로 그 순간, 아래층으로 향한 층과 위에 층의 어느 쪽 양방향으로 시선이 동시에 끌려 이것이 무얼까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펼침]은 바로 [빛의 펼침]이다. 혹은 [빛이라는 공간]이다. 혹은 []에 의해 뒷받침된 [공간]이다. 현실의 물질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 감각, 신체성]이 현실 화 되고 공간화 되는 것을 유지시키는 것이 []이다.


거의 그어진 선 정도의 폭밖에 없는 [검정] 부분이 눈에 강하게 작용 하는 것이 신비롭게 빠져들어 가 [그것]이 어두운 수면처럼 조용하게 눈에 보이지 않게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 빛남은 깊이에서부터 온 것으로서 그 [반대편] 까지 펼침이 번지고 있다고 느꼈다.

 

펼쳐져 있는 것은 확실히 [공간], 현실적이라기보다 감각적, 심적인 [공간]이라고 할 만 하고 나는 그처럼 느껴지는 현상의 뒷받침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필경 []의 감촉 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반대편이 아니라 이쪽의 흰색 층으로 보자면 겹쳐 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께는 가볍다.

 

그것은 칠한 방법이나 필치에 유래하는 것보다는 아크릴 물감의 수용성 용제 때문일 것이다. 유성의 용제가 빛을 통과하지 않는 것에 비해 아크릴은 투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에는 빛은 표면 위의 층에서 이쪽 측, 바로 우리 앞쪽도 투과되어온다. 즉 몇 겹 겹쳐 칠함을 넘어서고 있다.

 

치바 시게오(千葉成夫), 미술평론가

 

정리=권동철/이코노믹리뷰, 2019124일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