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자연 마음의 정화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천상병 전집(千祥炳 全集-詩), 평민사 刊>”
허공에 흩날리는 화려한 기억의 파편인가. 청먹(靑墨) 저 댓잎사이 보석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살, 온 몸을 다해 받아들인다. 강물에 하느작거리는 파릇한 춤사위의 대숲, 바람의 여운, 마침내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귀환의 발자국….
비로써 희로애락을 걸러 낸 텅 빈 근원인가. 하늘로 쭉쭉 뻗은 직선의 청명, 후련하다. 깊고 오묘한 수묵의 사의(寫意) 현대적 해석의 묵죽화(墨竹畵) 추상이다. 김현경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의 심층에 내재된 고요함. 꼭 필요한 공간이라 여긴다. 허정(虛靜)은 나를 정화하는 방법. 그곳으로 가는 통로가 ‘대나무’연작이다.”
◇치유와 인간성 회복
수직의 가는 선(線)들은 나부끼는 댓잎들을 지나며 속도감을 부각시킨다. 줄기를 표현해주는 동시에 화면의 분할요소로도 작동된다. 베일 듯 날카롭게 표현된 비 젖은 잎 사이 흘러내리는 먹….
달(月) 안에 담겨져 있는 대나무와 동그란 원(圓)은 보름달에 풍요와 희망을 빌던 어머니 마음으로 떠오른다.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오오 소소한 자연이 이렇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다니!
화면은 사생의 변용, 여운과 상상력의 강조와 분할법, 뿌리거나 흘린 흔적, 그린 후 덮는 행위와 해체 등 독자적 기법특징으로 운용된다. 이를 통해 정신성과 시지각이 유기적으로 펼쳐져 이미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이끌어 낸다.
지워가는 수행성을 통해 비움이 드러나듯, 반복으로 쌓아올리는 무의식 상태의 적묵법 운용 역시 의식정화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죽(竹)은 그 자체로 ‘나’와 동일시되어 자아성찰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작품의 운치(韻致)는 품격으로 우러난다.
김현경 작가는 20여년 ‘대나무’작업에 천착하며 묵죽화 표현방식의 확장을 통해 동시대 조형언어로써 소통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지향한다. 이는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와 덕목을 제시해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의 작품에 녹아있는 ‘허정’의 가치 역시 치유와 인간성회복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데 도움 되길 소망한다.”
△글=권동철, 12월호 인사이트코리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