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울림, Sonido
‘Sonido’모더니즘에 대한 단 하나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롭다’이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보면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주제, 구도, 화풍, 기법 등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모더니즘 미술의 경우 작가 별로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작가가 이질적인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모더니스트들의 최우선 과제는 기존 예술의 통념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것의 창조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더니스트들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비난 받고 멸시 받고 조롱 받는 쪽을 훨씬 가치 있게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지위조자 낮은 바닥에 내려놓는 바로 이러한 순수한 정신으로 인해 결국 모더니스트들은 그 어떤 시대 보다 더 고고한 엘리트 예술집단이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또한 모더니즘의 기점을 19세기 후기인상주의로 가정했을 때 두 세기가 지난 지금 당시 모더니스트들이 했던 전위적인 시도와 파격적인 기법들은 차분한 분석과 관습적인 분류에 의해 하나의 예술사조로 단조롭게 수렴되고 있다는 점도 반성적으로 사고해 봐야 한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치열한 자기파괴 정신이 희석되고 과거 르네상스 시대 혹은 그 후기의 매너리즘이 그러했듯 모더니즘 자체가 클리셰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김성혜의 작품을 살펴본다면 그 안에서 두 가지 모더니즘의 알레고리를 읽어낼 수 있다.
첫째. 결과물로서 추상화로 귀결된 듯 보이지만 사실 김성혜의 초창기 작품은 자연을 그려낸 풍경화였다. 자연물을 캔버스에 담는 행위는 언제나 한계점에 봉착한다. 우리가 자연을 아무리 똑같이 재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어떤 뛰어난 테크닉 혹은 테크놀러지로도 소용없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우문현답이 바로 추상이다. 자연이 본질이라면 대상의 형태와 색채를 추상화 할 때 보다 온전히 그것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혼합 재료의 사용이다 이전의 김성혜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작업하는 전통적인 서양화 양식을 따랐었다. 하지만 이제 캔버스는 단지 작품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며, 액자의 상하좌우 구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어 물감을 반드시 사용할 필요도 없고 재료의 한계도 기법의 한계도 없다.
미학자이자 미술사가인 타타로키비츠(Wladyslaw Tatarkiewicz2)가 명명한 대이론(Great Theory) 은 기원전 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미학 사상을 일관되게 이끌어온 아름다움의 일정한 공식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항하여 일어난 취미론 그리고 그것을 극단으로 끌어낸 미적태도 론의 소산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그 어떤 울림을 주는 모든 것을 미적이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혜의 작품을 보며 이것이 어떤 대상에 대한 모사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찾아낼 필요는 없다. 마음속의 소리, ‘Sonido’ 그것에 귀를 기울여라.
△글 |시각문화학자 오상희<Ph, D. Oh Sanghee(PhD in Visual Culture Studies)>.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학부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 △이코노믹리뷰 2020년 6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