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筆)은 나의 주체에 속하는 것이요, 먹(墨)은 화면이라는 객체에 속하는 것이다. 필(筆)은 유위(有爲)라면 먹(墨)은 무위(無爲)의 세계다.(…)따라서 ‘먹’은 그 자체가 하나의 대자연의 압축태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조작을 불허하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다.1)” 고봉준령의 깍아지른 듯 한 절벽, 유장한 강물의 역사, 뭉실뭉실한 구름들이 소낙비로 쏟아진 후 해맑은 텅빈 하늘…. 우주만물이 생성과 소멸로 순환하는, 풍화(風化)의 덩어리같은 저 “생(生) 면 천에 스며든 먹물의 은회색(銀灰色)은 얼마나 아름다운가!2)” ◇먹빛의 시간성 마음과 지혜의 동시성 화면엔 한자어가 스미어 있다.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3)”라고 추사 김정희가 극찬했던 한비(漢碑)에 드러나는 평평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