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판화에서의 공간해석은 대개 역원근법이었다. 이것은 화원과 대상과의 신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인데, 화원은 중인이고 그렸던 인물은 보통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경우가 많았다. 멀리 있는 신분이 높은 인물을 보다 자세히 그려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공간을 많이 점유해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역원근법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 우리나라에 투시원근법이 도입될 때 19세기 말 원근법체계가 완성되어가는 시기의 그림은, 서구에서는 거꾸로 원근법에서 벗어나는 시기와 같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피카소가 원근법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한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과 우리나라에서 원근법을 거의 완성해 가던 1895년에 출판된 <텬로력뎡>에 수록된 김준근의 목판화는 유사한 정도의 원근법체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도판08.1. 도판08.2.)
그러므로 서구에서 원근법으로부터 벗어나 환영이 제거된 몽타주의 공간해석을 도입하는 모더니즘의 과정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민화의 책거리 그림과 같이 원근법이 도입되는 역으로의 전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조향숙의 공간 해석은 우리의 전통적인 방법에서 출발한다. 기억의 여러 층위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향숙은 다양한 방법의 공간해석을 시도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같은 전적류에서 보이는 하나의 그림에 사건을 전개시키는 원인, 사건, 결과의 3가지가 동시에 들어가 시간의 추이를 동시에 나타내는 ‘서술적, 심리적, 도식적인 원근법’으로 불릴 수 있는 다차원의 공간해석을 도입했다.(도판09. 도판10. 도판11.)
이러한 구분은 구름 선의 문양이나 중첩된 파도치는 선 등으로 화면이 나뉘어서 시간과 공간의 다른 장면을 나타낸다. 이렇게 분할된 형상들의 관계는 ‘투시원근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공간이며 다분히 관람자의 상상력 속에서 심리적으로 완성을 해야 하는 관람자의 참여도를 많이 필요로 하는 공간이다.
다만 우리나라 고판화에서는 이미지가 대부분 양화(positive)로만 이루어져 있으나 조향숙의 목판화에서는 양화와 음화(negative)가 동시에 나타나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표현을 한다. 그 외에 따로 찍은 이미지나 혹은 금박지를 덧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포함하고 아예 금박지위에 목판화를 찍어 독특한 질감 효과를 실험하는 등의 한층 더 복합적인 공간을 전개한다.(도판12,1. 도판12.2.)
최근에는 다색목판화에서 먼저 찍은 색판들을 나중에 찍은 검은 색판들과 병치시키는, 판화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설치개념의 실험을 한다. 이것은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구체적인 기억들의 두께가 시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추상화되고, 보다 단순해진 이미지들이 기억의 중첩된 층에서 분리되어 나란히 병치되면서 다이내믹한 조화를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은 모든 기억을 포용하여 함께 하모니를 이루는, 자신의 정체성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 자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판13.1. 도판13.2.)
▲글·도판제공=임영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교수, 2020.12.
Writing and fig=Yim Young Kil, professor of printmaking College of Fine Arts Hongik University, 2020.12.
▲[한글평론 원제목]우리 전통의 정신과 형식에서 지속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행복한 기억들”연작–조향숙의 목판화에 대한 단상(斷想)들-
[English criticism title]The Series “To Find Lost Time-Happy memories”, Continued in the Spirit and the Form of Korean Tradition–Thoughts on the woodcut of Jo Hyang Sook-
▲자료출처= Jo Hyang Sook, To Find Lost Time-Happy memories(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행복한 기억), 2020. 12.2~7. 선 아트센터(SUN ART CENTER)개인전 도록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