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현재는 우리에 대해 작용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이고 운동적인 것이다.1)”
1980년대 중·후반 선보인 최명영 단색화 ’평면조건‘의 수직수평 선(劃)은 그려 넣은 것이 아니다. 겹겹 층을 관통하며 배어나오는 일상의 자국처럼 질료의 반복축적이 품고 우려낸 자국이다.
“캔버스바탕에 검은 질료로 전면도포하고 그 위에 백색(白色)으로 수직수평을 반복해서 쌓아가는 방식이다. 검은 바탕은 우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런 과정의 축적이 어느 단계가 되면 수직과 수평의 부침(浮沈)이 일어나고, 바탕은 선(線)이나 점(點)으로 남는 통어(統御)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특히 추사체를 생각했다. 추사(秋史)가 새로운 공간을 정하면서 획을 펼치는 형식을 떠 올리기도 한다.2)”
이것은 “(...)‘서로 곁 하여’, ‘서로 잇따라’라는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즉 형식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능동적이고 자기활동적인 것3)”이며 “다음에 지성이 그것을 종합(Synthesis,묶어놓음)하여 하나(Einheit)로 생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4)”

화면은 선험적 감각의 얼개로 일깨워지는 사상(事象)의 의식현상으로 “움직임을 머금은 부동성(Immobility)으로 어떤 한 장면을 위한 동시성이며 그 자체5)”로 원초적 감성의 추상(抽象)을 포괄한다. “이러한 층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넘쳐흐르며 항상 [자신의] 예기치 못한 풍요로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것은 또 다시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의 초월(Dépassement)에 대해 해명해야 할 부담을 가진다.6)”
“물질적 반복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요소나 순간들의 반복이다. 반면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상이한 수준들에서 일어나는 전체의 반복이다.(...)전자는 현행적이고 후자는 잠재적이다. 전자는 수평적 반복이고 후자는 수직적 반복이다.7)”
그리하여 질료와 정신의 인과율로써 ‘평면조건’에 대한 회화적 물음은, 장구한 세월의 유가적(儒家的) 관습에 따른 한국적성리학의 가치에 다다른다. 바로 “유교의 정좌수련은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으로 향하는 것이다.8)”

◇경(敬)의 수양론 심화의 정신화
여기엔 일찍이 “마음을 성품과 감정의 통합체로 인식9)”하였던 퇴계의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구방심(求放心)10)”과 연동되는 경(敬)의 도덕적수양론이 스미어 있다. 또 율곡이 “기(氣)는 이미 형적(形迹)을 겪어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는 것11)”이며 “리(理)는 하나의 존재가 그러한 존재일 수 있는 본질이 되고 본래성12)”이 된다고 설파한 점을 상기시킨다.
무수한 물성의 반복중첩에서 우러나는 획(劃)과 소지(素地)를 드러낸 ‘평면조건’의 역동적 호흡은 사계절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온 한민족의 응축된 정신으로 환원(還元)되고, 담박한 고졸미(古拙美)의 한국성이 내재 된 통찰미학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웅숭깊은 물결과 조응한다.

“최명영 작가의 근본, 본질을 추구하는 바에서 모더니티의 추동력인 본질주의의 요소를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인성과 예술이 서로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심화(心畫)로서의 전통적 사유와도 길을 함께 한다.13)” 바로 그곳에 펼쳐지는 “서(書)야말로 단색화의 원점이자 궁극이고, 일획은 모든 색과 조형의 시작이자 끝14)”이 된다.
그리하여 청명하게 열려진 ’평면조건‘의 영속(永續) 항해가 지금 우리의 정신구역을 통과하며 성찰의 경이로움을 체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글=권동철 미술전문기자·전문위원, 1월28일 2026, 인사이트코리아]
[참고문헌]
1)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지음, 박종원 옮김, 아카넷.
2)최명영 화백, 나의 수직수평에 대하여, 2026.
3~4)순수이성비판1(Kritik der reinen Vernunft),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지음, 백종현 옮김, 아카넷.
5)김용대 전 대구미술관장, 平面條件, 2015.
6)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ance de l'Ego),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민음사.
7)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질 들뢰즈(Gilles Deleuze)지음, 김상환 옮김, 민음사.
8)최명영 작가, 지금 여기의 삶, 2024.
9)~10)퇴계평전, 금장태 지음, 지식과 교양.
11)~12)율곡 이이, 예문동양사상연구원·황의동 편저, 예문서원.
13)이진명 미술비평가, 흰빛의 마음: 한국모더니즘회화의 재구성, 2022.
14)초월의 일획, 이동국 예술의전당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아트 인 컬처(art in culture) 7월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