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상이란 형상 없는 것의 흔적이다.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질료가 현전하는 즉시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한다. 하지만 질료는 극단적으로 아득해지는 것이다.1)”
다시, 소요유(逍遙遊) 한 줄기 곡풍이 강으로 내려오자 물안개들이 유려한 몸짓으로 솟구쳐 흩어졌다. 말러 교향곡5번 아다지에토(Adagietto) 선율이 깊고 흐린 마음의 풍경화 속으로 출렁였다. 새떼들이 지나간 팽팽한 속도의 자국에 상냥한 믿음이 번지는 기류가 이끌리듯 빨려드는 어떤 환기의 촉발.
그때 “장자(莊子)가 말했다. 지인(至人)이라고 하는 자는 정신을 시작도 끝도 없는 허무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고 유형(有形)을 초월한 무하유(無何有)의 경지에 편히 잠들며 일절 형체를 남기지 않은 채 물처럼 흘러가고 지극한 청허(淸虛)를 생겨나게 한다. 彼至人者, 歸精神乎无始. 而甘冥乎无何有之鄉. 水流乎无形. 發泄乎太清.2)”

◇물에 비친 그 몽상의 새벽
이를테면 무뚝뚝하게 서 있는 형상, 강바람에 부딪히며 고독에 관한 서사를 써내려가는 덩치 큰 금속, 그곳의 고립(孤立)을 오직 적막한 혼돈으로 채색하는 눈발이 소리 없이 대지에 내려앉는다.
그러나 “무섭고 놀라운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3)”처럼 그 모호한 전율 속에서도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事象)의 심오한 신비를4)”드러내는 저 물의 관용이 아니면 무엇이 참신함을 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아 “정화 후에 남아 있던 그림자의 흔적을 거두어 간다.5)”던 몽상(夢想)의 새벽. 겹으로 흐르는 물그림자에 초췌하게 떠오르는 메마른 자화상이여!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만물의 질서가 절에서 비롯되는 까닭(所以節水)6)”임을 설파하며 물의 근원을 중시했던 조선후기의 지성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출생 한 곳은 남양주 마현(馬峴)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해져 강폭과 물살이 큰 곳이다.
한강상류에서 자란 “정약용은 장가들러 양평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갔는데, 이때 배 안에서 시를 한 수 지었다. ‘아침햇살 뱉은 산 맑고도 멀고 봄바람 스친 물 일렁거리네. 옅푸른 풀 그림자 물 위에 뜨고 노오란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차츰차츰 서울이 가까워지니 울창한 삼각산 높이 솟았네.’7)”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1786~1855)와 동갑내기 친구가 바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이다. 시대의 열풍을 불꽃같은 삶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발자취들이 남긴 흔적들이 생생한 역사가 되고 있는 현장. 여기 그 강바람에 실려 오는 너무나 인간적인 고뇌의 허무감을 토로하노니.
“서리 이슬은 급급히 내리고 해묵은 풀은 면면히 이어지는데,…새벽꿈은 몹시도 짧아서 순식간에 세상이 변해 버리니, 저 푸른 하늘은 무슨 마음으로 우리의 도를 끝내 궁하게 한단 말입니까.8)”
[글=권동철 9월5일 2025. 9월호 인사이트코리아]
[참고문헌]
1)비밀의 취향(Le goût du Secret),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지음, 김민호 옮김, 이학사.
2)莊子(장자), 안동림(安東林) 역주, 현암사.
3~4)신화의 힘(The Power Myth),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빌 모이어스(Bill Moyers)지음, 이윤기 옮김, 북이십일 아르테.
5)단테와 융Ⅰ, 아드리아나 마짜렐라(Adriana Mazzarella)지음, 김덕규 옮김, 융심리학연구소.
6)다시읽는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해석자 안문길, 비채의 서재.
7)다산 정약용 평전, 김상웅 지음, 두레.
8)완당전집 제3권 서독(書牘) 여섯 번째/한국고전번역원, 임정기 譯, 1995.